대기자 1만 3000명, ‘학원 뺑뺑이’로 돌봄공백 메워…“단축근로 등 자유롭게 쓰는 분위기 조성돼야”
박 씨의 자녀는 12시 40분 정규수업이 끝나면 방과후교실과 돌봄교실을 이용해 3시까지 학교에 머문다. 태권도 학원 차로 이동해 4시 반까지 태권도 수업을 받는다.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에 가서 5시 반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온다. 박 씨는 “휴직이 반려됐고, 연차를 사용해 적응 기간만이라도 옆에 있어주려 노력했다”며 “중간에 회사에서 부르려 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가 되면 워킹맘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른바 하교 후 일정 관리에 대한 문의 글이 잇따른다. ‘6시 퇴근하고 집에 가면 7시인데 8살짜리를 7시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려야 하는 건가’, ‘하원 후 태권도랑 영어 학원을 보낼 예정인데 학원에서 학원 간 이동은 아이 혼자 못하는데…다들 어떻게 하시나요?’, ‘학교 문은 아침에 몇 시에 여는 건지…8시 전에도 등교 가능한가요?’, ‘돌봄교실 떨어졌는데 막막합니다. 일을 그만둬야 할까요?’ 등의 내용이다.
영유아기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종일반 등을 이용해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돌봄이 이뤄진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 이후 돌봄은 대부분 가정의 몫이다. 초등학교에도 방과후교실이나 돌봄교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신도시 등 과밀학급 지역에서는 원한다 해도 추첨에서 떨어져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태규 국민의힘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2020~2022년 1학기까지 돌봄교실 이용자 현황 자료를 보면 2020년 돌봄교실 대기자는 1만 949명, 2021년 1만 6893명, 2022년 1만 3150명이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20년 1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3년간 민원분석시스템에 수집된 돌봄교실 관련 민원을 분석한 결과, 2020년 2228건에서 2021년 2530건, 2022년 3245건으로 계속 늘었다. 특히 겨울방학부터 입학‧개학 기간인 1~3월 민원이 전체의 33.7%를 차지했다. △돌봄교실 증설 요청 △돌봄 대상자 선정 관련 이의제기 △돌봄교실 운영 개선 요구 △돌봄전담사에 대한 불만 등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 경기도교육청에 돌봄교실 관련 민원을 제기한 A 씨는 “신도시라 아이들이 많은데 80명 중 30명만 초등 돌봄교실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며 “세금은 똑같이 내는데 누구는 추첨에 당첨돼 기회를 갖고 누구는 가질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같은 문제로 대전광역시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한 B 씨는 “돌봄교실에서 탈락하면 퇴사와 경력단절까지 고려해야 하는 맞벌이에게 기약 없는 대기는 너무 가혹하다”며 “(돌봄교실) 반을 증설해서 모든 학생이 돌봄교실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돌봄교실에 탈락하거나 돌봄교실이 끝난 시간 이후에는 결국 ‘학원 뺑뺑이’ 말고는 답이 없다고 학부모들은 말한다. 교육부가 지난 7일 발표한 ‘2022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 주요 특징’ 자료를 보면 초등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85.2%로 전년 대비 3.2%포인트 올라 상승폭이 가장 컸다. 중학생은 76.2%(전년 대비 3%포인트↑), 고등학생은 66%(전년 대비 1.4%포인트↑)였다. 교육부는 초등학생의 사교육비가 유독 크게 높아진 배경으로 돌봄 부담을 꼽았다.
박민아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는 “부모들이 자녀를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이유가 태권도를 가르치고 싶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하교 시간에 맞춰 태권도 학원에서 데리러 오고, 매일 수업이 있는 몇 안 되는 사교육 기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전국의 태권도 학원이 일하는 엄마 대신 돌봄‧보육 역할을 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전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 28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저출산 5대 핵심 분야를 △돌봄과 교육 △일‧육아병행 △주거 △양육비용 △건강으로 정하고 세부 대책을 발표했다. 이 중 초등학교 1학년 엄마들의 경력단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으로는 ‘일‧육아 병행’ 분야의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확대’가 있다. 현재는 근로자가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할 수 있다. 이번 대책에서는 이 연령을 12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6학년으로 바꾸기로 했다. 사용할 수 있는 기간도 부모 1인당 현행 최대 24개월에서 최대 36개월로 늘렸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행보다 육아기 근로 단축 기간을 늘리긴 했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파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며 “소득이 감소하더라도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육아기 근로 단축 기간을 6~7년까지 늘려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초등돌봄 강화 대책으로는 ‘늘봄학교’라는 이름으로 돌봄교실 운영 시간을 저녁 8시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돌봄유형 다양화 및 맞춤형 방과후 프로그램 제공 등을 통한 돌봄공백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적 돌봄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현행 돌봄교실의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간다면 실효성이 없다고 말한다.
조순아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정책국장은 “과밀학급의 경우 돌봄 전용 교실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공간 확보도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늘봄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2025년부터 늘봄학교를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하는데 인력 확충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자원봉사자로 채우고 있다”며 “돌봄전담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정재훈 교수는 “늘봄학교 제도가 시행되면 초등학교 시기의 사회적 돌봄 체계가 완성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질 높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게 인력‧자원 투자가 필요하고, 지역 아동센터와의 연계를 통해 공간 확보나 프로그램 내실화 등을 도모해 현재 돌봄교실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혜진 초등돌봄전담사는 “5시 이후까지 돌봄교실에 남는 아이들은 부모가 오기만 애타게 기다린다”며 “몸이 아프면 엄마랑 집에 있을 수 있으니까 아프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과연 아이가 학교에 저녁 8시까지 있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학부모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 가족의 시간을 보장하는 권리를 사회적으로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의 박은지 씨는 “제도가 마련돼 있다 해도 회사에서 사용할 수 없으면 유명무실한 것”이라며 “아빠 육아휴직‧육아기 단축근로 등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엄마들의 경력단절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