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에 빠졌다고? 반전샷은 있었다
▲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최종라운드를 펼치는 나상욱. 그는 선두를 달리다가 우승 부담감과 늑장플레이에 대한 갤러리들의 야유를 견디지 못하고 아쉽게 무너졌다. AP/연합뉴스 |
여기까지는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동전의 양면이 있는데 그중 한 면만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고향 한국에서 말이다. ‘케빈 나(미국명) 왜글 스토리’의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반쪽과 이후 추가 스토리를 <일요신문>이 취재했다. 주요 내용은 나상욱과의 통화, 그리고 나상욱의 친형인 나상현 씨(한체대 박사과정)의 제보에서 나왔다.
#반전, 전화위복, 나이스 가이
처음 미국 언론도 나상욱을 강도 높은 톤으로 비판했다. 조롱에 가깝게 그를 놀리기도 했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3라운드가 끝난 후였다. 하지만 4라운드에서 적지 않은 수의 갤러리가 도를 넘어선 행동을 한 후 분위기가 반전됐다. 일부 팬은 나상욱이 어드레스를 취하면 “방아쇠를 당겨라(pull the trigger)”, “어서 쳐라(Hit it)”며 고함을 질렀다. 어떤 갤러리는 나상욱이 왜글을 하면 “하나, 둘, 셋…” 카운팅에 들어갔다. 심지어 13번홀(파3)에서 그들의 조롱 대상(나상욱)이 볼을 물에 빠뜨리자 일부 팬들은 나상욱의 성을 빗대 “나나나나~, 나나나나~, 헤이~, 굿바이”라는 노래까지 불렀다. 골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관전 태도였고 이는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그런데 야유와 조롱 속에 오버파로 무너지면서도 나상욱은 최선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경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페어웨이를 뛰어다녔고, 경기 후에는 자신의 볼과 장갑에 사인을 해 팬들에게 건넸다. 눈물을 글썽인 채 자신을 제치고 우승한 매트 쿠차의 우승 소감을 경청하며 축하를 보냈다.
이러자 반전이 일어났다. 물론 한국처럼 ‘스스로 무너진 늑장플레이’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한 보도도 있었지만 정반대로 ‘나상욱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줬다’, 그리고 ‘갤러리들이 자성해야 한다’는 반대편의 목소리가 잇달아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5월 13일자 <뉴욕타임스> 1면 기사다. ‘심리적 불안감이 그를 망쳤지만 그는 품위를 지켰다(Even as a Golfer’s Nerves Foil Him, He Shows Grace)’는 제하의 기사는 “갤러리의 야유를 들었고, 무척 힘들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것을 받을 만하다”는 나상욱의 멘트를 소개했다. 또 나상욱이 다른 골퍼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스윙문제를 코치에게 전가하지 않은 것도 높이 평가했다.
이 기사는 마지막에 ‘나상욱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날 오후 내내 그랬던 것처럼 고통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며 나상욱의 태도를 칭찬했다.
<뉴욕타임스> 외에 다수의 미디어가 ‘도대체 (갤러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우리는 나상욱에게 얼마나 미안해야 하는가?’라며 자성 및 나상욱 격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사이트 <SB네이션>은 5월 14일자 보도에서 ‘나상욱은 이 무례하고 조악한 갤러리의 행위에 대해 심지어 자기 자신을 탓했다. 그가 (4라운드에서) 페어웨이를 급히 뛰어다니는 모습은 지켜보기에 안쓰러웠지만 우리의 마음을 녹였다’고 소개했다. 특히 마지막에는 ‘나상욱이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그가 그의 악마(스윙입스)를 빨리 극복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나상욱의 친형 나상현 씨는 “반전은 제법 컸다. 언론보도뿐 아니라 상욱이하고 나만 볼 수 있지만 팬들의 트윗도 엄청났다. 전화위복이라고 상욱이는 나이스 가이가 됐다”고 설명했다. 나 씨에 따르면 ‘너 하던 대로 계속해라’는 격려가 쇄도했고, 심지어 방송에서 나상욱을 욕한 해설자의 페이스북이 비난 댓글에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나상욱도 “많은 격려가 있었다. 대회를 마치고 올랜도 공항에 갔는데 한 팬이 ‘우리 플로리다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고 짧은 일화를 소개했다.
#나상욱 VS 케빈 나
나상현 씨는 한국 언론에 대한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상욱이는 미국에 있고, 투어 일정상 바빠서 한국보도를 일일이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너무 속이 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언론은 동전의 양면의 나쁜 쪽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나 씨는 “좀 심했다. 미국의 비판 기사를 그대로 옮겨왔고, 그나마도 번역이 틀린 경우가 많았다. 반면 <뉴욕타임스>같이 상욱이를 이해하고, 그 스포츠맨십을 칭찬하고, 갤러리를 비판한 내용은 소개되지 않았다. 답답하다”고 설명했다. 나 씨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을 위성 생중계할 때 해설을 맡은 한국 방송사의 해설자에게 항의 문자를 보내 사과를 받기도 했다.
나 씨는 “언젠가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언론은 성적이 나면 ‘우리 나상욱 선수’, 반대의 경우는 재미동포 케빈 나로 부른다고. 이게 실감이 된다”고 말했다.
한 가지 일화도 덧붙였다. “작년에 상욱이가 한 홀에서 16타(파4홀 미PGA 최다타)를 쳐 불명예기록을 세울 때도 한국에서는 희한한 일이라며 이슈화만 했다. 이후 후반에 상욱이가 언더파를 치고, 또 올해도 해당 대회에 출전해 문제의 나무에 깃발을 걸어놓고, 톱으로 자르려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등 긍정적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모습은 외면했다.”
나 씨는 “같은 재미동포지만 앤서니 김과 나상욱은 미국에서 좀 다르다. 앤서니 김은 미국사람들이 아메리칸(미국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케빈 나는 코리안 아메리칸(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상욱이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상욱이가 어렸던 까닭에 좀 다혈질이었다. 하지만 3~4년 전부터 상욱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했다. 종교적으로 안정감을 찾아 지금은 결코 남을 탓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평이 아주 좋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예전에 접했던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툭 하면 상욱이를 매도하니 속이 많이 상한다. 내 동생의 참모습을 살펴봐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
▲ 늑장플레이 비난 받던 나상욱은 크라운 플라자 인비테이셔널에 나와 한 주 만에 전체적으로 빨라졌다는 평가를 얻었다. 연합뉴스 |
Q : 잭 존슨, 인터뷰 안한 이유 나상욱 때문?
A : 성적 나빠 인터뷰 대상서 제외
나상현·상욱 형제로부터 이번 왜글 파문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몇 가지 이야기와 비화를 들었다.
―한국 중계방송에서 해설자가 잭 존슨(3라운드 나상욱의 동반자)이 나상욱의 늑장 플레이 때문에 화가 나서 공식인터뷰도 안 했다고 말했다.
▲(나상욱)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날 잭 존슨 성적이 나빴다. 그래서 인터뷰 대상이 아니었다. 내 플레이에 열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해야 할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는 존슨이 나중에 트위터를 통해 명백히 밝혔다. ‘누구도 내게 인터뷰 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존슨과는 개인적으로 친한 편이다.
―4라운드 때 매트 쿠차와 동반플레이를 했다. 쿠차의 반응은 어땠나?
▲(나상욱) 워낙 갤러리들의 야유가 거셌고, 모두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쿠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샷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이동시간이라도 줄이는 게 도리 아닌가? 골프 격언에도 ‘빨리 걷고 천천히 치라’고 했다. 그런데 11번홀에서 쿠차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가 10홀이 넘도록 다녔는데 대화 한마디 할 기회가 없었다.” “네게 방해가 안 되려고 뛰어다니느라 그랬다.” “잘 안다. 내 캐디와도 네 이야기를 했다. 고맙다.”
―사실 나상욱만 늦게 치는 것은 아니다. 슬로 플레이는 미PGA에서 늘 문제가 돼 왔다. 이번 사건이 이렇게 크게 비화된 다른 이유가 있나?
▲(나상현) 일단 상욱이가 지나치게 늦게 플레이한 것은 맞다. 내가 봐도 그랬다. 그리고 둘째는 상욱이의 솔직한 인정이 표적이 된 결정타가 됐다. 아마 슬로 플레이를 인정한 건 나상욱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한다. 슬로 플레이에 벌금 대신 벌타를 주자고 주장한 타이거 우즈도 사실 빠른 선수가 아니다.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 스타플레이어에게는 좀 관대한 경향이 있다. 잭 존슨도 느리기로 유명한 선수인데 마스터스 우승 후 쑥 들어갔다.
―나상욱을 비롯, 벤 크레인, 잭 존슨 등이 슬로 플레이로 유명하다. 빠른 선수는 누가 있나?
▲(나상욱) 브랜트 스네데커는 연습스윙을 하지 않는 선수로 유명하다. 그리고 크리스 라일리는 급하기로 유명하다. 먼저 친 선수의 공이 떨어지자마자 샷을 날린다. 어떨 때 보면 동시에 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나상욱은 원래 플레이가 느리다’고 계속 지적을 받다가 이번에 터진 것이라는데.
▲(나상현) 나도 주니어 때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상욱이의 플레이 속도는 원래 보통이다. 샷보다는 그린에서 시간을 끄는 경향이 더 많았다. PGA 선수모임 차원에서 경고가 10회가 되면 매년 벌금을 내는데 내가 알기로는 상욱이가 벌금을 낸 적이 없다. 상욱이의 늑장플레이는 지난해부터 문제가 됐는데 이유는 스윙 교정 때문이다. 비거리를 늘리기 위해 스윙을 바꾸는 과정에서 입스(yips)가 온 것이다. 중계방송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경기 중 “이제 제발 치자”라고 혼잣말을 하는 등 상욱이 스스로도 고통이 심하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모습이 어글리해 보이고 괴상망측하게 비치는 것도 안다. 스스로도 나도 답답하고 싫다고 한다. 선수 출신의 미국방송 해설자도 “저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 주를 쉰 뒤 나상욱이 크라운 플라자 인비테이셔널에 나왔다. 2라운드 때 심판이 또 시간을 재기도 했지만 프리샷 루틴(pre-shot routine)을 바꿔 전체적으로 빨라졌다는 평가를 들었다. 성적도 마지막 날 66타를 치며 13위로 선전했다.
▲(나상욱·미 언론 인터뷰 정리) 맞다. 스스로 고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다고 얘기한 바 있는데 바로 습관 바꾸기를 시도했다. 주위에서 갑자기 큰 변화를 주면 샷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고, 본인도 솔직히 걱정이 많았는데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샷에 앞서 일단 목표점만 응시하며 밸런스를 찾고, 어드레스 후에는 몇 번 왜글을 하고 바로 친다. 조금 더 긴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하면 보통 12초가 걸린다. 참고로 플레이어스 대회에서 48초까지 나왔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