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으로 부르는 칼의 노래, 그 우아하고 화려한 천년 춤사위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 들고서[일요신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선생이 열아홉 살(1780년)에 지은 ‘칼춤 노래. 미인에게 주다’[무검편. 증미인(舞劍篇. 贈美人)]라는 제목의 한시 중 일부다. 여유당전집(시문집 1권)에 수록된 이 시는 과연 무엇을 노래한 것일까. 바로 진주에서 칼춤 추는 광경, 즉 검무(劍舞)를 보고 지은 시다.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나는 선녀처럼 살짝 내려앉으니
발밑에 번쩍번쩍 가을 연꽃 피어난다.”
선생은 이 시에서 검무가 “백 사람이 배워도 한 사람이 겨우 성공”할 정도로 어려운 춤이라면서 여성 춤꾼의 기예를 “옛날 여협(여성 협객)을 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240여 년 전 선생의 눈을 사로잡았던 검무는 과연 어떤 춤이었을까. 국가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의 세계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
진주검무는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서 전승되는 전통적인 여성 검무다. 검무는 검기무(劍器舞)라고도 불리는데, ‘검기’란 향악에서 칼춤에 쓰이는 칼을 뜻한다. 진주검무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신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조선시대에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동경잡기’, ‘삼국사기’ 등의 문헌을 보면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검무를 즐긴 듯하다. ‘동경잡기’ 권1 풍속편, ‘무검지희’ 조에서는 ‘황창무’라는 검무의 유래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칼춤을 잘 추기로 유명하던 신라 소년 황창이 백제왕 앞에서 칼춤을 출 기회를 얻어 그를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백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신라 사람들이 이를 안타까이 여겨 그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황창을 본뜬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면서 황창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설 속의 황창을 신라 화랑인 ‘관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황창무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경상도를 대표하는 검무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 들어서 검무가 궁중의 연향(잔치)에서 자주 공연됨으로써 ‘정재’의 요소가 더 많이 가미되었다. 정재란 대궐의 잔치 때에 벌이던 춤과 노래를 말한다. 이 시기에 검무에서 가면(탈)이 사라지고, 남성 대신 여성이 춤을 추는 등 일대 변화가 생겼다.
조선시대에 검무는 궁중에서 애용되는 연희 종목이었다. 대궐 잔치의 준비 및 이행 과정 등을 세세히 기록한 ‘연향의궤’에는 검무에 대한 내용이 빈번히 등장한다. 정조 때 화성에서 벌인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두 사람의 여령(궁중 잔치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던 여자)이 양손에 검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고종 시절의 ‘진연의궤’에도 검무가 기록돼 있는데, 이전과 달리 춤추는 무희가 4명으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고종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재무도홀기(연희 때 춤의 배역, 순서, 반주 음악 등을 세밀히 적은 기록)에는 검무를 춘 무희 4명의 소속과 성명이 적혀 있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무희 넷 중 세 명은 혜민서 소속의 의녀, 한 명은 상방(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관리를 맡은 관아) 소속의 침선비인 것으로 나타난다.
진주검무는 이러한 정재 계열의 검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등 각 지방 관아에 관비에게 노래와 춤을 익히도록 하는 일종의 기녀 양성기관인 교방청을 설치해 운영했다. 교방청의 기녀 중 기예가 빼어난 이들은 궁중 잔치 때 한양으로 불러 올려지고, 훗날 낙향한 기녀들은 자신들이 체득한 검무를 후대에 전했을 것이다. 이러한 궁중 검무의 지방화 및 교방 예술의 전승 과정을 통해 진주검무 특유의 우아하고 화려한 춤사위와 장단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 앞에서 공연되던 춤에서 유래한 만큼 진주검무는 최고의 격식과 형식미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진주검무 예능보유자였던 고 성계옥 선생은 진주검무를 “은은한 비단결 같은 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진주검무는 조선시대 무사 옷을 갖춘 8명의 무희가 두 줄로 마주보고 서서 양손에 색동천을 끼고 도드리장단, 느린타령, 빠른타령에 맞추어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사위 등 춤사위의 종류가 다양하며 독특하다. 반주 악기로는 피리, 저, 해금, 장구, 북 등이 쓰인다. 진주검무는 연출형식, 춤가락, 칼 쓰는 법 등이 과거 궁중에서 펼치던 검무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진주검무의 전승 무대 역할을 하던 진주 교방청은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로 진주감영이 폐쇄되면서 해산되었다. 국권 상실 후 진주 교방의 후신은 일종의 기생 조합 형태로 유지되는데, 이 시기에 최순이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고, 그 후학들이 검무의 선구자 역할을 하면서 진주검무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여러 예능보유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지탱되어 왔고, 현재 김태연, 유영희 보유자와 진주검무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자료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