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한테 뒷문 열어줬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업체다. 더군다나 이 지분을 사들인 곳은 세계 엘리베이터 업계 점유율 2위인 쉰들러홀딩AG로 이번 매입을 통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4%를 확보하게 됐다. 쉰들러 측은 투자 목적으로 지분매입에 나섰다고 밝혔지만 향후 추가 지분 매입을 할 경우 적대적 인수 합병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얼렸다. 결과적으로 KCC의 쉰들러에 대한 지분 매각이 현 회장의 경영권을 흔드는 격이 된 셈이다.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각 이후 한 외국계 증권사는 ‘KCC의 이번 지분 매각 목적은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실탄 비축용’이란 보고서를 작성해 다시 한번 업계를 놀라게 했다. 현대건설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부터 현대그룹의 상징적인 계열사로 여겨졌던 곳이며 외환위기 이후 채권단에 넘어간 현대건설의 새 주인이 되기 위해 현 회장이 지난해부터 양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상태다. 이런 탓에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가 이번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각을 통해 현 회장에게 이중고를 안겨줬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지난 2003년 정상영 명예회장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승리한 현정은 회장은 이후 김윤규 전 부회장과의 갈등과 이로 인한 대북사업 차질 등 굴곡을 겪기도 했지만 그룹 경영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듣게 됐다. 그러나 지배구조 안정화가 늘 숙제였다. 현재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구조를 보면 현 회장 3.9%, 현 회장 어머니인 김문희 씨 19.4%, 현대증권 5.0%를 포함해 기타 1.6%를 합쳐 29.9%를 현 회장 측의 확실한 우호지분으로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선에 머물던 쉰들러 측 지분율이 이번 매입을 통해 25.54%로 뛰어올라 현 회장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복병으로 등장하자 재계 인사들은 ‘소버린의 SK 침공’ ‘칼 아이칸의 KT&G 경영권 위협’ 등과 유사한 사례로 거론하고 있다.
국제적인 엘리베이터 업계 기업인 쉰들러는 세계 4위 규모의 국내 엘리베이터 시장 참여를 적극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쉰들러는 세계 100여 국에 사업장을 거느린 세계 2위 엘리베이터 제조업체로 지난해 매출액 6조 8000억 원을 기록한 거대 기업이다. 단순한 외국계 투기자본의 ‘먹튀’ 수준을 넘어 보다 공격적인 경영권 전쟁 양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최근 론스타-외환은행 사태를 지켜보는 재계인사들 머릿속엔 ‘또 한번의 외국계 자본 침공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란 예상마저 자리 잡고 있다.
또 한번 시숙부의 ‘선택’이 현정은 현대 회장을 곤경에 빠트린 셈이다. 이에 대해 현대 측은 “우호성향 지분을 모두 합치면 50%에 육박하기 때문에 경영권 방어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고토(현대건설) 회복’ 꿈에 강력한 복병으로 등장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메릴린치증권은 KCC의 지분 매각에 대해 ‘현대건설 인수에 나서기 위한 실탄 확보용’이라 평했다. 지난해 중순부터 업계에선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직접 나서는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현 회장이 왕회장(고 정주영 명예회장) 장자격인 현대차 정몽구 회장에게도 정중하게 의사전달을 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을 정도다. 현 회장의 친인척 아우르기와 현대건설 인수 추진은 정몽헌 회장 사후 정주영-정몽헌-현정은 승계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행보로 풀이됐다. 이런 배경 탓에 KCC의 지분 매각은 현 회장의 야심찬 행보에 ‘찬물 끼얹기’로 받아들여졌다.
이 같은 시각에 KCC 측은 즉각 “현대건설 인수 의사가 없다”는 공식입장을 내놓았다.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각에 대해서도 “재무구조 개선과 설비증설 투자 목적”이라고 밝힌 상태다. 현 회장의 행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증권도 ‘KCC의 현대건설 인수 참여 가능성이 낮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해 메릴린치 주장을 반박했다. KCC가 이번 지분 매각을 통해 확보한 실탄은 총 2360억 원 정도인데 반해 현대건설 인수 비용은 현재 업계에서 수조 원이 들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업계에서도 KCC의 현대건설 인수 참여 논란이 수그러들었다.
KCC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일격을 당한 셈이 된 현대그룹도 즉각 추스르기에 나선 인상이다. 지난 4월 12일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 지분 3%를 추가 확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안정적인 경영권 방어를 위해 홍콩회사 케이프포천이 갖고 있던 현대상선 주식 309만 주를 4월 안에 462억 원에 인수하게 됐으며 이로써 현대엘리베이터의 현대상선 지분율은 20.16%로 증가하게 됐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4조 8455억 원 매출액과 4664억 원 영업이익을 기록해 그룹 내에서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현대엘리베이터와 마찬가지로 외국 자본의 침공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현재 현대상선에 대한 외국인 보유 지분율이 40%를 넘어선 상태다.
현대상선 지분구조를 보면 현재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가 17.16%로 최대주주이며 현 회장이 3.36%를 보유해 현 회장 측 우호지분이 20.49%인 상태다. 반면 이번 매각으로 인해 케이프포천 지분은 10%로 낮아졌다. 현대 측은 “케이프포천이 우호 법인이므로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KCC가 현대상선에 대해 우호지분 6.26%를 확보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만약 KCC 보유 지분이 외국 자본에 넘어간다면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 위험에 놓이게 된다. 현재 제버런트레이딩이 갖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은 15.8%로 최대주주 지분율을 바짝 뒤쫓고 있다. 제버런이 KCC 보유 지분에 눈독을 들인다는 소문도 이미 증권가에 널리 퍼진 상태다. ‘경영권 안정’과 ‘정통성 인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는 현정은 회장 앞날에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가 최대 복병인 셈이다. 물밑에선 ‘시숙부의 난’ 2라운드가 사실상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