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현실 세계 재현’이라는 고유 영역을 통째로 접수해버린 사진은 20세기 들어서 회화가 개척해낸 새로운 영토에도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회화와 사진이 화합의 장으로 찾아낸 것이 ‘극사실주의’다. 1960년 대 말 미국에서의 일이다.
이 중 ‘포토 리얼리리즘’은 캔버스에 감광액을 발라 이미지를 프린트하고 붓이나 에어 스프레이로 다듬는 기법이다. 사진과 회화가 타협점을 찾아 절충한 방식이지만 사진에 회화가 종속되는 인상이 강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실감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사진과 회화는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엇박자를 내는 부분이 있다. 사진은 회화만큼 공간의 깊이를 연출하지 못한다.
정영한의 회화는 이 지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사진의 평면성과 회화의 입체성을 교묘하게 조합시켜 착시 효과를 극대화한다. 즉 회화의 기본 방법인 붓을 사용해 그리되 그린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게 처리한다. 그래서 흡사 사진처럼 보인다. ‘회화 기법으로 찍은 사진’이라고나 할까.
그는 정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사과나 꽃, 팝아트적 이미지나 바다 풍경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소재에 표정이 없다.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놓은 기물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그리기 위해 작가는 인터넷에 떠다니는 이미지를 활용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진으로 보는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한다.
정영한은 왜 인화된 사진 효과를 내기 위해 전통적인 그리기 기법을 고수하는가. 그것은 서양 회화가 500여 년 동안 구축해온 착시 효과에 대한 자기반성 같은 것이다. 평면 회화가 그동안 연출해낸 공간은 모두가 허구 세계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아무리 사과를 실감나게 그려도 그것은 평면에 나타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이 갖고 있는 정직한 평면성으로 회화의 허구 세계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허구 세계는 아무리 익숙한 이미지라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낯설다. 이러한 낯섦을 철저한 회화 기법으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사진의 차가운 이미지로 그려낸 사물들의 생생한 실재감의 표현이 그것이다.
그가 그린 꽃이나 사과는 과장된 크기와 정교한 묘사로 나타난다. 중간 색조의 단색 배경이 공간감을 주기는 하지만, 액자 속 그림 같은 평면성을 유지한다. 실재감과 평면성의 모순적 결합을 통해 우리는 현실 세계가 아닌 낯선 세상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정영한이 도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회화가 연출하는 세계는 착시에 의한 허구의 세계이며,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공간과도 같은 가상 현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