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 후 가족여행 안 가고 개근하는 학생 비하하기도…혐오 정서 뿌리에 대한 다각도 접근 필요
#브랜드명 바꾸고 지우면 혐오 표현 사라지나
그동안 거주지를 바탕으로 한 혐오 표현은 반복해서 생산돼 왔다. 주거(주공아파트 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 엘사(LH 사는 거지), 빌거(빌라 거지), 반거(반지하 거지), 월거지(월세 거지), 전거지(전세 거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0년대 초반 일부 학생들이 사용하던 단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퍼졌고, 이후 임대주택을 둘러싼 다양한 논란이 일 때마다 언론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며 확산하기를 반복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임대주택이나 신혼희망타운 등 공공 혹은 임대아파트에 LH 로고 혹은 자체 브랜드를 넣고 있다. LH는 2000년 그린빌을 시작으로 뜨란채, 휴먼시아, 천년나무, 안단테 등의 브랜드를 개발했다. 그러나 해당 브랜드들이 저가 임대주택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지면서 입주민들 사이에선 입주민이 선정한 단지명을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이에 더해 같은 학군에 임대아파트가 포함되는 것을 막기 위해 뜻을 모으자는 글이 올라오거나, 아이가 임대아파트 학생과 짝꿍이 되자 학부모가 “짝꿍을 바꿔주지 않으면 전학을 가겠다”고 학교에 항의하는 사례까지 나오는 등 임대아파트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LH는 공공 임대주택에 민간 브랜드를 적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LH 공공주택사업본부는 최근 ‘국민이 공감하고 입주자가 체감하는 공공주택 품질 혁신 추진 전략’을 내놨다. 신규 공공 임대주택의 경우 민간 건설사 브랜드를 도입하고 기존 공공 임대주택에 대해서도 입주민이 원하는 단지명으로 교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교 안 빠지면 개근하는 ‘거지’?
최근에는 초등학교에서 ‘개근거지’라는 말까지 확산하고 있다. 여행을 가지 않고 개근하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코로나19 방역조치 해제 이후 해외여행을 가는 가족들이 늘어나면서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번지고 있다. 개학 이후 학부모 커뮤니티를 중심으로는 ‘개근거지’에 관한 게시글들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5월 초 한 학부모 커뮤니티에는 ‘개근거지라는 말 듣고 충격받았네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요즘 아이들은 학교를 안 빠지고 꼬박꼬박 나가면 개근거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 주기적으로 학교를 빼먹으면서 해외를 다녀와야 한다던데 우리 때는 아파도 학교는 가야 한다는 문화였는데 놀랐다. 개근이 가난의 상징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토로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나뉘었다. ‘일부 학교 이야기인데 확대된 느낌이 있다’, ‘오히려 체험학습 보고서 쓰기 귀찮아서 주말이나 방학 때 여행을 더 간다’는 의견과 ‘이전보다 체험학습계를 내는 경우가 늘어난 것을 체감한다’, ‘코로나19가 끝나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등으로 갈렸다.
올해 초등학교 1~4학년(2013~2016년생)이 되는 학생들은 입학 때부터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이른바 ‘코로나 세대’다. 코로나19 발발 첫해인 2020년에는 정상 등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2021년부터 등교 수업이 점차 재개되다 2022년에 들어서야 전면 대면 수업이 진행됐기에 학교 경험 자체가 적다.
더욱이 이들은 입학과 동시에 해외여행이 제한되었기에 학기 중 체험학습계를 내고 여행을 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세대다. 2022년 하반기부터 해외여행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점을 고려하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들 세대를 중심으로 ‘개근거지’라는 표현이 퍼지기 시작한 셈이다.
#이런 표현이 정말 아이들 사이에서 생겨났나
그런데 해당 표현이 실제로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오히려 극소수의 어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온라인 커뮤니티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불필요한 불안감과 위화감을 조성하고 아이들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는 비판이 많다.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이 아무개 씨(34)는 “애들은 생각보다 누가 학교에 나오고 안 나오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런 아이들이 과연 이런 말을 만들었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정말 남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 정슬기 씨(32)는 “애들 친구 엄마한테 개근거지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누가 여행을 다녀오면 아이들이 말을 꺼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김 아무개 군(11)은 “개근거지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어린이날 연휴에 필리핀으로 여행을 간 친구가 있긴 했지만 반 친구들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신 아무개 군(12)은 “개학하고 반에서 3명이 미국과 베트남,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우리 사회 내 혐오 정서의 뿌리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파트 브랜드들이 만들어지고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주거’에서 ‘휴거’로, ‘휴거’에서 ‘엘사’로 바뀔 뿐 혐오 표현이 사라지기는커녕 새롭게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정우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주거지, 사회적 지위 등으로 네 편 내 편을 나누며 이를 더 공고히 하려고 한다”며 “혐오 표현이 생겨나고 이에 공감하거나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현상이 지속되면 사람들이 계층 격차를 당연시하게 되고 이는 저출산과 같은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초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