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후보 시절 수차례 강조했지만 취임 후 침묵…호남 유권자 결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작용
“5·18 정신이 자유민주주의 정신이고, 우리 헌법가치를 지킨 정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헌법이 개정될 때 헌법 전문에 올라가야 한다고 전부터 주장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1월 10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앞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당시 윤석열 후보는 ‘전두환 옹호’ 발언, ‘개사과’ 논란 등으로 호남 유권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민심을 달래기 위해 대선 후보 선출 첫 지역방문 일정으로 광주를 택했지만, 항의하는 시민들이 길목을 막아서면서 윤 후보는 묘지 내 추모탑까지 가지도 못했다. 그러자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후보 대선 공약에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윤 후보는 2022년 2월 6일 광주지역 기자 간담회에서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는 것이 내 입장이지만, 대선 공약사항이 될 수는 없다”며 “국민 합의에 의해 헌법 개정이 될 경우, 전문에 들어가는 게 타당하다”고 답했다. 대선을 한 달 앞둔 상황에 윤 후보가 자신의 생각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고 두 번의 5월 18일이 지나갔다. 윤 대통령은 아직 개헌에 대해 구상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 4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도 “오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이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만 말했을 뿐,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이 압박에 나섰다. 선거제도·정부형태 등은 아직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았지만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은 대통령실과 여야가 공감대를 이룬 만큼 우선적으로 ‘원포인트 개헌’을 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앞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대선 후보 당시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대선 공약에 포함시킨 바 있다.
이재명 대표는 5월 17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윤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고, 민주당 공약이기도 했던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지킬 때가 됐다”며 “원포인트 개헌을 여당에서 협조해주길 공식 제안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용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제안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5월 17일 “당이 입장을 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도 후보 때 공약했다”면서도 “원포인트 개헌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여론이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볼 필요가 있다”고 신중한 답변을 내놨다.
더 나아가 대통령실은 “원포인트 개헌 제안은 비리에 얼룩진 정치인들의 국면전환용 꼼수에 불과하다”며 “5·18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민주당이 여러 악재를 희석시키고자 ‘이슈 블랙홀’인 개헌안을 꺼냈을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원포인트 개헌’을 두고 여야가 입장차를 보이는 것은 정치적 계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개헌이 이뤄지려면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된 후, 국민투표에 부쳐 투표자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민주당이 제안한 개헌 방안은 내년 4월 치러지는 총선에 국민투표를 함께 진행하자는 것이다. 투표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여권에선 이러한 방안이 총선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호남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율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여권 한 관계자는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은 광주를 비롯해 호남 시민들의 오랜 숙원”이라며 “내년 4월 총선에 개헌안 국민투표가 함께 올라가면 개헌 열망이 높은 호남 유권자들이 투표소에 많이 나설 것이다. 호남에 현재 살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나 전국에 나와 있는 호남 시민들도 투표에 적극 참여하리라 본다. 그런데 호남 유권자들은 국민의힘보다는 민주당 성향이 많다. 호남 투표율이 높아지면 민주당이 총선에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5월 18일 MBC라디오 ‘신장식의 뉴스하이킥’ 인터뷰에서 “5·18 정신을 총선과 같이 하게 되면 민주당에 유리한 이슈일 수밖에 없다. 타이밍을 이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정략적이고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며 원포인트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민주당에서는 ‘원포인트 개헌’을 계속 화두로 올린다는 방침이다. 정부여당이 개헌 요구를 계속 피하긴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 나오기 때문. 민주당 한 관계자는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이 아니라도 국민 여론조사를 해보면 개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개헌은 윤 대통령도 누누이 강조해온 사안이다. 간호법 거부권 행사할 때처럼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개헌이 공식적으로 대선공약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발뺌할 것인가”라며 “이번에야말로 원포인트로 개헌이 이뤄지게 하는 게 가장 우선이다. 정부여당이 계속 반대한다면 국민과의 약속을 계속 지키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으로 비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