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김대중 대 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을 떠나기에 앞서 김정일 국방위원 장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 ||
당시 박 수석은 며칠간 해외방문을 마치고 첫 출근을 했다. “만약 김정일이 서울 답방을 한다면 그전에 박 수석이 베이징 정도에서 사전 조율을 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박 수석이 미국에 개인적 볼일을 보러 갔다”고 설명했지만 기자들은 믿지 않았다. 박 수석이 행여 또 다시 ‘대북 밀사’로 갔다왔을 가능성을 확인해야 했다.
집무실에서 기자들을 만난 박 수석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딸을 만나러 갔다왔다. 공연히 작문들 하지 말라”고 일소에 부쳤다. 그러나 기자들이 끝까지 반신반의하는 눈치를 보이자 재미교포인 형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형님, 제가 미국에 가서 뵙고 인사 드렸죠. 기자들이 안 믿고 하도 야단을 해서 전화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날 해프닝은 박 수석이 김대중(DJ) 정권 내 남북관계의 ‘알파와 오메가’를 쥐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벌어졌다. 대북 사업은 박 수석을 반드시 경유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6·15회담 때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두 차례나 방북했지만 ‘내막’은 박 수석이 훨씬 자세히 꿰고 있었다.
임 전 국정원장조차도 DJ정권 말기인 연초에 4억달러 대북송금설로 정국이 요동쳤을 때 모 언론사 사주를 만나서 자신보다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모를 파악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2000년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임동원 당시 원장과 북한의 김용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 간의 협상 라인과는 별도의 ‘해결사 채널’이 막중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과 북측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그들이다.
‘박-송 채널’은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 풀어나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4·13총선 직전에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을 발표한 것도 박 장관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박 장관은 정상회담 직전에 임 원장과 함께 김정일에게 전달할 문건을 최종 점검하기도 했다. DJ는 두 사람을 불러 문건 복사본을 주면서 수차례에 걸쳐 수정작업을 시켰다.
박 장관은 훗날 “문건을 받아 보곤 ‘이게 김정일에게 주는 서류구나’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본인도 이 같은 역할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석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하면 정상회담 뒷얘기를 털어놓는 게 한동안 낙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박 장관은 ‘재량권’을 행사했다. 임 원장이 정해진 과제를 점검하고 완료하는 데 주안점을 뒀던 것과 대조적이다. 가령 박 장관은 예정에 없던 남한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을 성사시켰다.
6월15일 김정일은 자신이 주최한 고별 오찬에서 남측 언론의 신속한 보도를 감탄하다 갑자기 “민족문제는 정확하게 보도해야 하는데 안 그렇다. 같은 민족으로서 상호간에 비난을 하지 말자는 뜻을 남한 언론에 전해달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이에 박 장관은 즉각 “언론사 사장단을 한 번 초청하면 내가 모시고 오겠다”고 제안했고 김 위원장은 “8·15 전에 오라”고 화답했다. 북측이 6월12일 <조선일보>와 KBS의 평양행을 불허하겠다고 치고 나왔을 때 설득작업을 주도한 것도 박 장관이었다.
박 장관은 서울에 돌아온 뒤에 김 위원장과 허물없이 편하게 대했던 일화를 종종 소개하기도 했다. 6월14일 만찬에서 김 위원장은 취기가 오르자 박 장관에게 서로 팔을 끼고 술잔을 비우는 ‘러브샷’을 제의했다.
15일 고별 오찬에서도 우리측 인사에게 노래를 청하면서 박 장관을 지목했다. 박 장관이 ‘내 곁에 있어주’를 부르자 김 위원장은 박수를 치면서 앵콜을 청해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불렀다고 한다.
박 장관은 “김 위원장은 화통한 인물이다. 풀어야 될 문제가 생기면 즉각에서 지시해버렸다. 나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박 장관은 왜 현대측이 남북정상회담 직전 4억달러를 송금하도록 움직였던 걸까. 돌이켜 보면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현금을 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당시에 이미 감지됐었다.
우리측은 ‘구체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매달렸고 북측은 이 점을 악용해 ‘현찰’을 요구했던 것이다. DJ 일행의 평양행이 당초 12일에서 13일로 하루 연기된 것만 해도 그렇다.
북측이 10일 “기술적 준비관계로 불가피하게 일정을 늦췄다”고 전화 통지문을 보내왔다는 게 당시 청와대측 해명이었으나 사실은 4억달러 입금이 차질을 빚은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거액의 현찰을 입금했으나 북측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남북정상간 두 번의 회담과 두 번의 만찬을 갖는다는 게 사전 실무협상이 도출한 합의사항의 전부였다. 때문에 북한의 정상이 김 위원장인지 아니면 대외관계에서 북한의 정상 역할을 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인지조차 불투명했다.
당시 청와대측은 “북측이 말하는 정상은 김정일이 아니라 김영남일지 모른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불같이 반응했으나 자신 있게 해명하지는 못했다.
박 장관은 훗날 “산 넘고 물 건너서 남북 정상회담을 갖기로 2000년 4월8일 합의했다. 그러나 북측이 정상회담 합의문에 김정일의 서명(수표) 문제를 두고 딴 소리를 했다. ‘합의문이 안 나올 수도 있는데 무슨 수표냐’며 확답을 하지 않았다”고 속 타던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 대북송금과 관련, 지난 16일 특검 사무실에 출두 하는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임준선 기자 | ||
북측이 “공항 도착성명을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게 유일한 암시였다. 이와 관련, 박 장관은 2001년 정책기획수석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한 뒤 “모든 일정이 불확실한 가운데 김 위원장이 영접을 나온 것을 보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공항 출영으로 정상회담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6월14일 밤 DJ의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불쑥 찾아온 것도 북측의 전략이었다. 남북정상은 13, 14일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그때까지 공식 합의사항은 없었다. 만난을 무릅쓰고 평양까지 들어간 DJ로서는 초조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북측은 1시간 전에 김 위원장이 DJ의 숙소를 방문한다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박 장관은 “김 위원장이 숙소로 찾아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고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숙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6·15공동선언문’에 서명을 한다. DJ가 그토록 원하던 서명을 평양 떠나기 전날 밤 내주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북측이 막판까지 우리측을 상대로 ‘줄다리기 게임’을 시도한 것은 4억달러 이외에 ‘플러스 알파’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었을 개연성이 농후한 셈이다.
4억달러 대북지원 의혹은 2002년 9월25일 국정감사장에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처음으로 폭로함으로써 불거진다. 그는 현대상선이 2000년 6월5일과 7일 산업은행에 당좌대출 4천억원을 받기 위해 제출한 대출신청서와 당좌대월약정서 등에 김충식 전 사장의 서명이 빠져 있다는 물증을 들이대며 “김 사장이 엄낙용 전 산은 총재를 찾아가 ‘그 돈을 회사가 쓴 게 아니라 갚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또 현대상선 대출 건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근영 산은총재에게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그때 만해도 엄 의원의 주장은 여론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편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곤혹스러워하던 병풍 의혹을 돌파하기 위한 이슈전환용 폭로 정도로 치부됐다.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출신인 엄 의원이 총대를 멘 정도로 여겼다. 또 현대관련 의혹을 꺼내 흔듦으로써 이 후보를 위협하는 다크호스로 떠오른 정몽준 의원의 바람을 잠재우려는 공작정치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그러나 엄 의원의 폭로는 현재 대부분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때문에 엄 의원이 어떤 경로를 통해 ‘극비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엄 의원 본인은 2002년 <월간조선> 5월호가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한미관계보고서를 인용 보도한 ‘현대는 정말 북한에 4억달러를 비밀리에 주었을까’라는 기사를 보고서 확신을 가졌다고 설명한 바 있다. 보고서 작성자인 CRS의 래리 닉스 연구원은 북한에 현대가 4억달러를 지원하고 그 돈이 군사비로 전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엄 의원의 폭로 과정에는 엄 전 총재가 핵심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엄 전 총재는 본관이 ‘영월’로 엄 의원과 같다. 두 사람은 종친회 모임에서 종종 만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엄 전 총재는 이회창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씨와 경기고 동문일 뿐만 아니라 세풍사건의 주인공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의 경기고 1년 선배다. 한나라당 인사들과 친분관계가 적지 않은 셈이다.
더욱이 엄 전 총재는 재경부 차관을 거쳐 산은총재로 재직하던 중 2001년 4월께 불명예 퇴직을 했다는 점에서 DJ정권과 악연을 갖고 있었다. 당시 부실기업 지원문제와 관련해 정권 핵심의 뜻을 거슬러서 반대하다가 괘씸죄에 걸렸다는 얘기다.
당시만 해도 ‘대북송금설’이 DJ정권과 악연관계인 엄 전 총재 등이 한나라당측과 협력해 만든 ‘대선 카드’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이회창 후보가 12월 대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판단한 DJ정권의 공직자들이 줄대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적지 않았다.
엄 의원이 폭로할 때만 해도 ‘박지원 연루설’은 별로 없었다.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 개입의혹 정도만 돌아다녔다. 하지만 2002년 당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단호하게 대응했었다.
박 실장은 그해 10월1일 비서실 직원 월례조회에서 한나라당이 현대상선 계좌추적을 주장하는 것과 관련, “법적 근거도 없이 계좌 추적이나 장부공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민감한 정국현안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 실장의 발언을 계기로 “계좌 추적이 가능한 사안”이라던 재정경제부의 방침은 “계좌추적은 안된다”는 쪽으로 급선회한다. 이어 박 실장은 10월5일 국감장에 출석해서는 “북한 사람에게 단돈 1달러도 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닷새 후인 10월6일에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모임에서 “계좌 추적을 하면 분식회계 등으로 인한 현대의 썩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대우가 무너지듯이 기업 신용도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면서 계좌추적 반대론을 폈다.
최근 급부상하는 박 전 실장의 거액수뢰 의혹은 DJ 정권 시절에는 제기되지 않았지만 현대상선 대출금 중 일부가 4·13총선자금으로 전용됐다는 풍설은 적지 않았다.
2002년 11월쯤 한 국정원 관계자는 “현대가 대출받은 4천억원 중 일부가 국내에서 사용됐다는 의혹이 있다”고 총선유입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대가 북한에 제공한 현금이 5억달러 이상이라는 주장도 여의도 정가에 돌아다녔다.
한 월간지는 또 현대상선이 2000년 3월에 4천억원과는 별도로 비자금 2백억원을 조성했고 이 돈이 정치권에 들어갔다는 의혹을 보도하기도 했다. 남북정상회담의 비밀을 쥐고 있던 박 전 실장이 이 같은 의혹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했음은 물론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