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뿔났다…친박도 쪼개졌다
▲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파문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 출두하고 있는 정두언 의원.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강창희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내리친 후 국회 장내는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원내지도부 합의에 따라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점쳐졌던 정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이날 본회의에 참석한 의원 271명 가운데 74명이 찬성, 156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사실상 반대 의사로 분류되는 기권과 무효는 각각 31표, 10표가 나왔다. 예상과 달리 압도적으로 반대표가 많이 나왔던 것이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정 의원은 표결 직후 “저의 진정성을 믿어준 선배, 동료의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됨에 따라 지난 7월 12일 정 의원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도 기각됐다.
# 박근혜 캠프-당 간 불협화음 탓?
이한구 원내대표는 이번 정 의원 체포동의안을 진두지휘했다. 여기엔 박근혜 전 위원장의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란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박 전 위원장은 총선 이후 친박 인사들을 주요 당직에 포진시키기 위해 애를 썼는데 이는 새누리당을 ‘제2의 선거캠프’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한 친박 의원은 “공식 캠프를 실무 위주로 짠 것도 당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포석 때문이었다. 박 전 위원장은 당과 캠프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대선을 치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전 위원장은 당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는 지도부에 일임하고 대권 채비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정 의원 체포동의안을 앞두고 이 원내대표에게 가결 입장을 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원내대표가 당 일각의 반발 기류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 체포동의안 가결을 밀어붙였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표결을 앞두고 초선 의원들 사이에선 “캠프에 끌려 다녀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적잖았다고 한다. 철저하게 핵심 친박 인사들 위주로 캠프가 꾸려져 소외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거수기’ 노릇만 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던 것이다. 여기에 동조한 친박 의원들 역시 상당수인 것으로 전해진다. 중립 성향의 한 초선 의원은 “유력 대선후보인 박근혜 캠프 측이 당을 배제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의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 이들은 불안해하기도 한다. 친박 신주류와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친박 구주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표결은 박 전 위원장에게 ‘실력 행사’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공식 대권 도전을 선언한 박 전 위원장으로서는 정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과정에서 드러난 캠프와 당의 불협화음을 조절할 당면 과제를 안게 된 셈이다.
# 민주통합당의 역투표?
정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가장 큰 이유는 국회 특유의 ‘제 식구 감싸기’ 때문이라는 게 정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죽을 듯 싸우다가도 체포동의안이 발의되면 방탄 국회를 열어 동료 의식을 발휘하는 게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다.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말만 앞세우고 아무런 장치도 마련하지 않았다. 진정성이 의심된다”면서 “4·11 총선 당선자 중 선거법 위반으로 조사받고 있는 의원들이 많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신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현재 검찰은 82명의 현역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정 의원과 가까운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은 표결 직전 본회의 자유발언을 통해 “여러분 중 상당수가 선거법 위반 수사를 받고 있는데 앞으로 회기 중 체포동의안을 보내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느냐”며 ‘반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 의원이 “형님(이상득 전 의원)과 대립각을 세우며 현 정권 내내 불행했다. 이번 검찰 수사 역시 표적수사”라고 호소해 동정 여론이 확산됐던 것도 부결의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번 표결을 놓고 박지원 원내대표가 기획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정 의원과 같은 날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 박주선 의원(무소속·선거법 위반)은 가결되고 정 의원만 부결될 경우 그 부담은 전적으로 새누리당이 질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 민주통합당 의원들에게 ‘역투표’를 하도록 지시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민주통합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정 의원이 부결되면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던 게 사실”이라면서 “박 원내대표가 이를 염두에 두고 새누리당과의 협상에 나섰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표결 직후 새누리당 내부에서 “이한구 원내대표가 박지원 원내대표와의 수 싸움에서 졌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의원들의 자유 투표로 맡겼어도 될 사안을 당론으로 추진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박 원내대표 역시 임석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져 검찰 수사선 상에 올라 있다는 점도 고려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박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내부에서 마치 ‘박지원이 자기가 살려고 정두언을 구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민주당 원내대표이지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 여야, 후폭풍 차단에 고심
정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직후 민주통합당은 새누리당을 향해 거센 포문을 열었다. 이언주 원내대변인은 “새누리당은 국민을 배신했다”고 말문을 연 뒤 “국민 앞에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떠들던 새누리당은 본회의를 40분간 지연하면서 (부결을 위한) 작전을 짰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 의원들 역시 체포동의안 반대표에 동참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커지자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새누리당 측도 “방탄 국회에 대한 책임은 민주통합당에도 있다. 정 의원의 체포동의안에 많은 민주통합당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다”며 역공을 가했다. 이 원내대표는 박 원내대표에게 동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 측은 이번 정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을 새누리당이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표결에 불참한 박 전 위원장을 흠집 내겠다는 전략이다.
새누리당은 대권 행보에 나선 박 전 위원장에게 ‘불똥’이 튈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분위기다. 박 전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비상대책위원회를 맡은 후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를 총선공약 1호로 내세웠었다. 그런데 정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면서 ‘신뢰’와 ‘약속’을 중시하는 박 전 위원장의 이미지에도 적잖은 타격이 예상되고 있다. 이제 갓 출범한 박근혜 캠프에 비상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캠프에 몸담고 있는 한 친박 관계자는 “박 전 위원장은 표결 하루 뒤인 12일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하고 참모들과 긴급회의를 했다. 그 결과 직접 입장을 표명하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박 전 위원장은 7월 13일 “정 의원이 이 문제에 대해 평소의 신념답게 책임지고 해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대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해 박 전 위원장이 조기 진화에 나선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정 의원 표결로 인해 그동안 쇄신을 부르짖었던 박 전 위원장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