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곪은 내부 갈등 이 참에 몽땅 몰아내자’
▲ 정몽구 회장 | ||
일단 검찰은 정 회장을 뺀 나머지 현대차 고위 임직원에 대한 즉각적인 신병처리를 미루고 있다. 경영공백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것이다. 때문에 김동진 부회장이나 채양기 기획총괄본부장(사장), 이정대 재경본부장(부사장), 김승년 구매총괄본부장(부사장) 등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인사들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것으로 보여진다. 정 회장 또한 향후 보석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재계 2위, 국내 수출 2위 기업집단의 총수가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속됐다는 점이다. 때문에 재계에선 현대차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번 사건에 대한 내부 책임을 따지면서 사태 수습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평지돌출 식으로 터진 이번 비자금 파문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됐고, 그게 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총수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는지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급 재벌총수가 연루돼 인신구속이 거론됐던 사건을 꼽자면 지난 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의 차남이 구속된 사례와 지난 78년 한국도시개발(현 현대산업개발)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으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아들인 정몽구 당시 사장이 구속된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당시 국내재벌 1위로 꼽히던 총수 대신 그들의 아들이 ‘사건 책임자’로 처벌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번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선 국내 주식보유액 기준으로 1위인 정몽구 회장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현대차그룹 경영의 핵심인 정 회장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안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현대차 안팎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 현대차그룹의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고위임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장면. 사진=우태윤기자 | ||
이런 무모한 ‘비상경영’ 선언 실행이 지금과 같은 현대차의 비상상황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런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했던 현대차 경영전략 추진실이나 구매총괄본부에 화살이 쏠리고 있다. 총수에 대한 충성만 있었지 정치적인 변수 등과 같은 외부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아 화를 키웠다는 것이다. 현대차 비자금 사태의 방아쇠를 당긴 내부고발자가 생겨난 상황도 문제지만 총수만 바라보는 현대차의 기업문화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현대차 안팎에선 현대정공 출신의 MK사단 위주로 돌아가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재무라인과 상황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현대차 법무실이나 대관업무 분야에 대해서도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특히 현대차의 2세 승계 작업이나 그룹의 극비 보안사안인 재무업무 분야에 대한 관리가 너무 거칠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대차 내부에선 외부 기업인수합병이라는 ‘부띠크’를 끼고 2세 승계 작업과 부실기업 인수 작업을 ‘섞어찌개’로 만들어 버린 부분에 대해서도 “바보 같은 짓이 었다”며 뒤늦은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계열사 압수수색에서 시작된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일망타진’식으로 속전속결된 데다 그 모든 책임이 총수로 쏠린 예가 규모 있는 기업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 회장 구속 이후 현대차 내부에서 ‘책임자 문책론’은 피할 수 없을 듯 보인다. 물론 조직정비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선 이번 비자금 사태로 현대차그룹도 과거 현대그룹에 버금가는 규모로 기획실(구조조정본부)을 재정비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MK 1세대로 불리는 회장-부회장급 전문경영인들이 물러난 뒤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사장-부사장급의 MK 2세대 전문 경영인에 대한 ‘교통정리’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지난 99년 이후 현대차 경영권을 인수한 뒤 현대정공 출신의 ‘MK 사단’과 현대차 출신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이번 비자금 사태에서도 현대정공 출신인 MK사단이 현대차그룹 재무라인을 틀어쥐고 있었음이 확인됐지만 오히려 이번 사태로 MK 재무통 라인이 ‘일망타진’ 형식으로 사법처리를 받을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대해서도 현대차 출신들은 냉소적인 반응이 없지 않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위기를 초래한 사람이 사태수습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일흔을 눈앞에 둔 정몽구 회장은 외아들 정의선 사장에게 현대차그룹을 물려주고 싶어한다. 현대차 비자금 사태는 현대차그룹 경영의 문제점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구속된 정몽구 회장의 복심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 주목된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