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은 안으로 굽겠지…’
▲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지분다툼의 결말은 현대가 장자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사진)의 뜻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 ||
현정은-정몽준 대립구도에 영향을 미칠 변수로 다수 재계 인사들은 정상영 KCC 명예회장을 거론해 왔다. 그런데 이젠 범 현대가 분쟁의 무게중심이 정몽구 현대차 회장 측으로 넘어가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가 장자인 정 회장과의 교감을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번 분쟁의 열쇠를 정 회장이 쥐게 될 것’이란 관측마저 등장한 상태다.
지난해부터 현 회장의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대북사업과의 시너지 효과 창출이 대외적인 명분이었지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그룹 창업 모태가 된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한다는 시각이 팽배했다.
당시 업계엔 ‘현 회장이 정몽구 회장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는 현대가 장자인 정 회장을 만나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허락’을 받으려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최근 현 회장이 “정몽구 회장을 찾아 뵙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기습적으로 인수하고 나서 ‘현대건설까지 노린다’는 관측이 대두되자 업계에선 “정몽준 의원이 큰형님인 정몽구 회장을 만나 현대건설 인수를 허락받았다”는 소문까지 등장했다. 관련자들이 모두 “그런 일 없다”고 일관했지만 그만큼 현대건설 인수과정에서 범 현대가 인사들에게 정몽구 회장의 암묵적 동의가 ‘절대적 의미’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임엔 틀림없다.
그렇다면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에 대해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여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다수 업계 인사들은 부정적으로 진단한다. 현대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현대그룹이 정씨가 아닌 현씨의 기업이 돼가고 있다. 현대가 장자인 정몽구 회장은 선친의 혼이 서려있는 현대건설이 현 회장에게 넘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
현 회장 부모인 현영원-김문희 부부의 최근 지분거래도 눈길을 끈다. 현-김 부부는 지난 5월 10일부터 5월 15일까지 현대증권 주식 13만 9670주를 내다 팔았다. 이를 통해 확보한 현금은 2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증권가에선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현대증권 유상증자를 준비 중이며 유상증자 시 기존 주주들이 약간의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현-김 부부가 보유 지분 중 일부를 처분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현대건설 인수 움직임과 더불어 현대그룹 계열사 지분을 통한 현 회장 일가의 ‘잇속 차리기’로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현 고문 부부의 사정에 따른 것일 뿐”이라 해명하고 있다. 현 회장도 지난 5월 21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아들 원태 씨 결혼식장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헛소문일 뿐”이라 못 박았다. 이 자리에서 현 회장은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며 여유를 보였다.
유상증자 진위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현씨 일가 위주로 굴러가는 현대그룹을 보는 범 현대가 인사들의 시선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정몽구 회장 또한 마찬가지일 것으로 다수 업계 인사들은 보고 있다.
현재 증권가에는 현대중공업이 지금껏 주장해온 것처럼 ‘현대상선 경영권에는 당장 관심이 없을 것’이란 소문이 등장한 상태다. 현대상선 지분 획득을 통해 현대중공업이 현 회장의 자금사정을 압박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현대건설 인수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 주목적이란 관측이다. 현대중공업 측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 때마다 “(현대상선) 경영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목적”이라 밝혀왔다. 결국 정 의원 측의 기습적인 현대상선 지분 매입이 ‘현대건설 인수 주체를 현씨가 아닌 정씨 일가로 만들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으로 받아들여지는 셈이다. 물론 이 같은 추론엔 ‘정몽구 회장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것’이란 전제가 깔려있다.
정몽준 의원과 물밑거래가 시도된다 할지라도 현 회장으로선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현대건설이 현대상선 지분 8.7%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 26.68%를 확보한 현대중공업의 현대건설 인수가 현 회장에겐 자금 확보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현대건설 인수에 쓰일 수 있는 실탄의 양이 많지도 않다. 친정 식구들을 총동원해 그룹을 지켜왔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범 현대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 꿈은 멀기만 한 것일까. 이번 사태에 대한 정몽구 회장의 무거운 입이 언제쯤 열릴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