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적 ‘인파이팅’ 신중한 ‘아웃복싱’
▲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왼쪽), 신동빈 롯데 부회장 | ||
반면 신세계는 5월 22일 월마트코리아를 인수한다는 깜짝 발표를 통해 확실한 유통 강자의 입지를 다졌다. 할인점 업계의 관심이 한국까르푸에 몰려 있는 동안 월마트 관계자와 일본에서 회동을 가지며 비밀리에 일을 진행해 한 수 위의 솜씨를 보였다. 인수합병 협상에서 최고 경영자가 진행 중인 사항을 언급하는 것은 유례가 없던 일. 하지만 신세계는 이례적으로 사장까지 나서서 까르푸 협상설을 흘렸다. 결국 시간이 흐르자 이는 신세계가 뒤에서 벌이는 월마트와의 협상을 커버하기 위한 ‘성동격서’ 플레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신세계의 지능적 플레이에 가장 막강한 화력(현금)을 갖고 있던 것으로 평가받던 롯데가 녹아웃됐다. 결국 롯데쇼핑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씁쓸히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롯데는 월마트코리아에 관심이 없었을까. 이에 대해 롯데 측은 “매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신세계가 따로 접촉했기 때문에 월마트의 매각 방침을 알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올해 2월 8일 상장하면서 유통과 석유화학 부문의 확대라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상장을 통해 3조 2000억 원이라는 자금을 마련했고 이 중 회사채를 제외한 2조 원 이상의 현금을 여유자금으로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 적절한 투자처를 결정하지 못한 것. 롯데쇼핑 상장은 증권사 출신인 신동빈 부회장의 작품이었다. 기업 공개에 소극적인 롯데그룹이 이례적으로 주력업체를 상장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컸다. 백화점과 할인점을 합한 매출액 규모에서 롯데는 그간 신세계보다 우위임을 내세웠지만 현재로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
한편 신세계의 정용진 부사장은 월마트코리아의 인수로 보다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마트 중국 상하이 산린점 개점식에서 ‘증여세 1조 원’을 발표한 후 월마트코리아 계약서 교환 자리에서 구학서 신세계 사장과 나란히 자리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본인 스스로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유통 기업,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신세계 지분을 법적으로 떳떳이 증여받는다는 청사진이 나온 이상 정 부사장은 경영권 승계에 한 발짝 더 다가간 셈이다.
게다가 최근 신세계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편법 시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신세계는 정 부사장을 앞으로 더욱 밀어올리는 전략을 취했다.
이 점은 롯데의 확장전략 사령탑을 맡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과 더욱 대비가 되는 대목이다.
52세의 신동빈 부회장과 39세의 정용진 부사장은 나이와 이력이 다르지만 국내 최대 유통그룹을 이끌어나갈 차세대 경영인으로 아직까지는 신격호 회장과 이명희 회장의 그림자에 가려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해부터 이들이 그룹 경영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비슷하다. 두 사람이 자주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이유다.
신세계의 경우 지난해부터 이명희 회장이 지분 증여와 증여세 납부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지점 개점식 행사에서 구학서 사장이 깜짝 발언을 한 것은 이미 오너 사이에서 충분히 검토되었던 내용임을 짐작케 한다. 신세계 측은 지난해 말부터 준비를 해 왔으나 적절한 발표 시점을 찾지 못하던 중 갑작스레 알려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용진 부사장은 1994년 삼성물산 입사, 1995년 신세계 입사 이후 기획조정실, 체인사업본부장, 경영지원실 임원을 거치며 12년째 회사 업무를 익히고 있다. 현재로서는 전문경영인이 경영 실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정 부사장이 직접 경영을 지휘하는 입장은 아니다. 본인도 “아직 경영에 대해 배우고 있는 과정”이라며 자신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그러나 “회장님처럼 사후보고만 받는 소극적 경영은 아닐 것이다. 지금 그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비해 신동빈 부회장은 증권회사 경력과 그룹 경영 경험이 풍부하고 이미 그룹을 전반적으로 지휘하고 있는 상황. 신 부회장은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일본 노무라증권 런던지점에서 6년간 근무한 뒤 1988년 롯데상사에 입사했다. 이후 호남석유화학 부사장, 기획조정실 부사장을 거쳐 현재 그룹 부회장, 코리아세븐·롯데닷컴·호남석유화학의 대표이사와 롯데호텔 정책본부장을 맡는 등 그룹 전반을 돌보고 있다. 증권회사 6년 경험에 18년간 그룹 경영을 돌봐온 것이다.
그러나 굵직한 사업 결정은 신격호 회장이 관여해 왔다. 한국까르푸 인수전에서 신 회장이 너무 비싼 가격에 무리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방침을 정해 놓았던 것이 ‘마지막 베팅’을 하지 않은 이유다. 신동빈 부회장의 재량에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롯데쇼핑은 한국까르푸의 적정 가격을 1조 3000억 원, 마지노선을 1조 5000억 원대로 정하고 협상을 진행했던 것으로 롯데 측은 밝히고 있다. 결국 1조 7500억 원을 제시한 이랜드에 한국까르푸를 빼앗겼다.
신 부회장은 복합쇼핑몰을 구상하는 등 추후 유통업 확장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복합쇼핑몰은 대형 건물을 이용하는 백화점보다 소규모 건물을 리모델링해 바로 입점이 가능한 규모의 것으로 알려진다. 또 자체적인 할인점 사업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신 부회장과 정 부사장은 둘 다 유통업계의 황태자로 불리지만 현재로서는 신세계의 정 부사장이 유통업계에서 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그간 백화점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전체 매출에서 신세계에 앞서며 자존심을 지켜왔다. 그러나 신세계가 월마트코리아를 인수하게 되면 전체 매장이 86개에서 102개로 늘어나 할인점 2위인 삼성테스코 홈플러스(42개)와 3위인 롯데마트(45개)를 합한 것보다 더 많아져 이를 따라잡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러나 신동빈 부회장은 롯데쇼핑 상장으로 만든 2조 원이 넘는 실탄을 확보하고 있어 이를 만회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호남석유화학 경영을 맡고 있는 신 부회장은 석유화학을 롯데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이에 주력하고 있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에쓰오일 자사주 매입을 통해 석유화학 부문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반면 신세계는 증여세 1조 원 등 정용진 부사장의 경영권 승계라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지능적인 인파이팅으로 먼저 ‘득점’한 신세계 정 부사장과 ‘체력’을 안배하며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롯데 신 부회장의 다음 대결이 기대된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