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과연 선(線)이 있을까. 무엇인가를 그릴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선이다. 우리는 그림에서 너무도 쉽게 선을 만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 만물 속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면과 면이 만난 결과가 선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선 자체는 없다.
따라서 눈으로 확인되는 세계를 충실하게 따랐던 서양 미술에서 선은 독자적 존재로 대접받기 어려웠다. 이에 비해 동양 미술에서는 선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동양의 회화는 선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의해 발전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선에다 성격을 부여해 가장 성공한 예술로는 서예가 꼽힌다.
서양 미술에서 선은 사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한 윤곽이나 면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아니면 그림의 기본 구성을 위한 밑그림을 잡는 정도로 쓰였을 뿐이다.
선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다. 지난 세기 초 선에 관심을 갖고 독자적 성격의 선을 보여준 작가로는 표현주의 계열의 화가 라울 뒤피와 조르주 루오가 먼저 떠오른다.
뒤피는 선에 음악적 성격을 담아 감각적 즐거움을 보여주었고, 루오는 종교적 정신 세계의 깊이감을 굵은 선으로 표현해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작가가 되었다. 모딜리아니와 에곤 실레도 개성적 선으로 독자적 인물상을 창출해냈다.
추상 미술의 등장과 함께 선은 가장 중요한 조형 요소로 떠올랐다. 선 자체가 독립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선에 의한 드로잉 개념이다.
이제 드로잉은 하나의 장르로까지 발전했다. 서예의 필법을 미니멀리즘과 결합해 추상미술의 거두가 된 이우환이 대표적인 경우다.
남지연도 드로잉 개념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 주목받는 작가다. 그는 드로잉의 본질에 속하는 붓이나 연필 등으로 그려내는 방법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지 않고 만드는 방법으로 선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준다. 만들어진 선으로 드로잉의 성격을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금속 공예에서 출발한 남지연은 철사를 이용한 드로잉 작업으로 새로운 감각의 회화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철사 드로잉으로 잡아낸다. 세밀한 선으로 정확하게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포즈는 매우 사실적이며 드로잉의 세련미도 보인다.
그가 드로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걷거나 뛰는 인물도 있고, 앉아서 사색에 잠기거나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있다. 이런 인물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건강한 생각을 보여주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런 생각은 오랜 공력이 묻어나는 드로잉의 힘과 철사의 물질감에 의해 또렷하게 다가온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