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면 기쁘고 져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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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프로와 아마, 고수와 하수, 남녀노소가 수담으로 어울리는 흥겨운 바둑대회다. 청소년 기사들과 중장년 기사들이 대결하고 있다. |
청풍명월은 승부를 가리는 게 전부가 아니고, 등수를 따지는 것만도 아니다. 5명이 한 팀을 꾸려 참가하는 단체전인데, 구성원은 남녀노소, 바둑실력에 제한이 없고 대국은 치수를 적용한다. 아마 6단인 A팀의 1번 선수와 아마 3단인 B팀의 1번 선수가 만나면? 3계단 차이이므로 보통은 아마 3단이 아마 6단에게 3점을 놓고 두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한 점을 빼 2점을 놓는다. 주최 측은, 아마 5~6단쯤 되는 동호인들은 자부심에서라도 자신의 실력을 당당히 밝히는 편인데 반해 저단이나 급의 참가자들은 “내가 고수들에게 잘 되겠어?” 아니면 상수한테 한번 이겨 보고 싶은 ‘당연한 마음’에서 스스로를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게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치수 덕분에 청풍명월에는 프로기사도 팀의 한 사람으로 참가할 수가 있고, 실제도 그렇다. 아마추어가 놓고 두면 되니까. 정상 치수보다 한 점이 줄어들기 때문에 아마 5단 정도면 2점, 6단급이면 정선으로 둘 수도 있다. 급들은 더 많이 놓고 급에서도 중-저급은 새까맣게 깐다. 아무튼 접바둑을 구경할 수 있다는 건 청풍명월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프로기사와 급 실력들, 아마 고단자와 중-저급의 주부 선수들이 6점이나 7점, 9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13점을 깔고 두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흥겨운 정경이다. 프로기사가 언제 이렇게 긴장의 허리띠를 풀고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희희낙락 승부를 하겠는가. 아마추어들이 언제 이렇게 프로에게 지도료를 내지 않고 마음껏 승부하겠는가. 10급 하수들이 언제 이렇게 고수들과 대회 바둑을 두어 보겠는가. 그래서 청풍명월의 표어는 저 유명한 바둑 잠언 ‘승고흔연 패역가희(勝固欣然 敗亦可喜)’다. 이기면 진실로 기쁘고, 져도 또한 즐겁다.
소문을 들은 기우회 회원들이 우리도 한번 나가 보자고 하기에 올해는 취재 대신 기우회 친구-선배와 함께 팀을 만들었다. 청풍명월은 매년 7월 마지막 주말, 토-일, 1박2일로 열린다. 날짜를 못 박아 놓은 몇 안 되는 대회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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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를 더욱 흥겹게 해주는 바둑가요제가 올해부터 신설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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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들이 전투를 끝낸 뒤 승패를 헤아리고 있다. |
그런데 둘 다 아니었다. 이번엔 길에 밝은 회원이 차를 몰아 준 덕분에 아침 9시 반 넘어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해 12시 반이 안 되어 도착했으니 3시간이 채 안 걸린 거다.
도착해 보니 벌써 짐을 풀고 바둑판을 벌인 팀들도 있다. 어제 저녁에 와 이미 근처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온 팀들이 덕동계곡을 추천한다. 올해는 56팀, 320명이 참가했다. 거기다 대회 진행본부, 제천시청 제천 바둑협회 관계자, 친구 따라 놀러온 후보 선수까지 합하면 얼추 400명이다.
인천 여성바둑연맹에서는 20여 명의 회원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왔고, 부산 여성연맹에서도 10여 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올해만 그런 게 아니다. 단골이다. 아니 고정이다. 무시무시한 아줌마 부대들. 광주의 대표적 인터넷동호회 ‘빛고을광주기우회(시샵 최병운)’는 단체로 노란 티셔츠의 유니폼까지 장만해 올라왔다. 중국 어린이 학부모가 눈에 띈다. 7월 중순 태국에서 열린 국제 어린이대회에 참가했던 팀인데, 우리 관계자들로부터 한국에 이런 대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귀국하자마자 다시 준비해 참가한 것이다. 중국 바둑, 오늘의 한 단면이다. 어린이들의 실력은 아마 2단.
청풍명월은 지난해부터 ‘청풍가요제’를 새 메뉴로 개발했다. 이게 더 인기다. 25팀이 참가했다. 주부 선수들은 단체로 무대에 올라가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월간바둑’팀은 리드기타, 베이스, 드럼, 선글라스의 보컬로 밴드를 구성해 나왔다. 명지대 여학생 둘, 추자도 자매 둘은 걸그룹 뺨치는 현란한 율동으로 장내를 압도했다. 대부분 바둑보다 노래 실력이 나아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가수다. 바둑-노래의 상품은 소정의 현금과 쌀 옥수수 감자…. 시상 부문은 바둑 잘 둔 상뿐 아니라 못 둔 상, 억울상, 꼴찌상, 멀리서 온 상, 나이 많은 상, 응원상 등등이었는데, 그 중 압권은 이것이었다. 시상식 때 할머니 한 분이 시상대 앞을 무단횡단 하셨는데, 본부석에서는 즉각 그 할머니에게 ‘지나가면 안돼요’상을 드렸다.
축제를 지원하는 제천시청, 주관하는 제천바둑협회 오만석 회장 이하 임직원, 협찬하는 타이젬, 제천 바둑을 지키면서 축제를 창안한 임창순 원장, 살림을 맡은 최희영 사무국장, 진행하는 세계 유일의 바둑행사기획업체 ‘클럽 A7’(대표 홍시범, 홍맑은샘의 아버지), 가요제를 담당하는, 노래교실의 선생이기도 했다는 꽁지머리의 김종서 작가, 사회 솜씨보다 노래 솜씨가 더 뛰어난 바둑TV 진행자 김지명 정다원 씨…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니다. 사실은 이 살인적인 더위에도 박달재까지 찾아가고야 마는 바둑동호인들, 그들이 더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