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윤현숙 씨 “기구 떨어뜨릴까 가슴 졸여...발레 시킬걸” 농담
▲ 손연재가 예선 6위라는 좋은 성적으로 결선에 진출했다. 손연재의 어머니 윤현숙 씨는 그간 가슴이 떨려 딸의 연기를 지켜보지 못했지만 결선에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
어머니는 오늘도 경기 도중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관중석을 빠져 나갔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손바닥은 이미 촉촉이 젖어 있고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호텔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경기장으로 향할 때만 해도 “오늘은 경기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막상 순서가 다가오자 그는 견디지 못하고 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손연재의 어머니 윤현숙 씨 얘기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딸을 위해 지난 5일 런던에 도착했던 그는 리듬체조 경기가 열리는 동안 웸블리 아레나를 이틀 연속 방문하고 있지만, 정작 딸의 경기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 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로테이션 3의 경기가 펼쳐진 둘째 날, 그리고 어머니가 경기장을 벗어난 이후 손연재의 곤봉 연기가 펼쳐졌습니다. 후프, 볼, 곤봉, 리본이 펼쳐지는 개인전에서 손연재가 가장 어려워한다고 알려진 곤봉이라 지켜보는 사람들 또한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곤봉을 한 차례 놓친 거야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연기를 펼치던 손연재의 슈즈가 벗겨지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일까요.
다행히 손연재는 끝까지 침착하게 자신의 연기를 마치고 포디움을 빠져나갔습니다.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는 슈즈가 벗겨진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듣고선 “연재가 극적으로 사는 걸 좋아하나보다. 지난번 세계선수대회에선 리본이 끊어지더니 이번에는 슈즈가 벗겨지는 일이 생겼다”며서 “지금까지 체조한 이래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일이 어떻게 올림픽 무대에서 일어나느냐”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리본 연기가 펼쳐질 때도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곤봉에서의 실수로 인해 리본 연기가 더욱 중요한 순간이라 어머니는 차마 그 경기를 지켜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손연재는 언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최고의 연기를 펼쳐 보이며 28.050점을 받았고 전날 점수에다 둘째 날 점수를 합치니 110. 300점을 기록, 총 10명이 나갈 수 있는 결선에 6위라는 성적표를 안고 진출하게 됐습니다.
손연재의 결선 진출이 확정되자마자 그가 소속돼 있는 IB스포츠 관계자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 어머니부터 찾았습니다. 어딘가에 숨어서 초조하게 경기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 했지만 어머니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출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얼굴은 이미 손연재의 경기 결과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연재가 환한 얼굴로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걸 숨어서 지켜봤다. 그걸 보고 연재 성적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내 딸이지만 어디서 그런 강심장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슈즈가 벗겨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흔들리지 않은 것 같다. 대단한 손연재다. 딸의 경기조차 지켜보지 못하는 소심한 날 닮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웃음).”
손연재의 어머니는 경기장을 찾은 조수경 심리학 박사와도 뜨거운 포옹을 나눴습니다. 손연재의 멘탈 치료를 맡고 있는 조 박사는 박태환, 양학선, 손연재 등의 심리 상담을 맡아 선수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듣고 해결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입니다. 이미 조 박사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고 손연재의 ‘매니저’로 3년 동안 각종 세계선수권대회를 돌며 손연재 알리기에 나섰던 IB스포츠의 문대훈 매니저도 가슴이 벅차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손연재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쁘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3년 전만 해도 손연재는 리듬체조 세계에서 변방의 선수, 이름도 실력도 별로인 동양 선수로 인식됐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를 가도 손연재를 알고 있고 심판들도 손연재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며 응원을 보낸다. 연재도 열심히 했지만 한국 리듬체조의 발전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뒤에서 열심히 도와준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리고 싶다. 내일부터는 경기장에서 딸의 경기를 지켜볼 것이다. 이젠 걱정 없이, 긴장을 놓고 연재의 연기를 감상하고 싶다. 아마 연재도 부담을 덜었기 때문에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결국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너무나 힘들게 시작한 리듬체조였고 협회의 관심과 지원이 미비했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기에 한국 리듬체조 역사상 최초로 이뤄낸 올림픽 본선 진출은 그한테도 ‘뜨거운 그 무엇’으로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어머니가 이런 농담을 내놓습니다. “내가 왜 기구를 갖고 하는 리듬체조를 시켰는지 모르겠다. 후프 볼 곤봉 리듬 등 연기 감상보다는 그걸 떨어트리는지 안 떨어트리는지에 더 집중해서 보니까 자꾸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냥 발레를 시킬 걸 그랬나보다(웃음).”
그래서 리듬체조가 어려운 종목인 지도 모릅니다. 인간이기에 실수는 항상 나올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 실수조차 허락되지 않는 게 리듬체조이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묵는 숙소 앞에서 어머니는 우연히 딸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런던 도착 후 본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딸에게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어머니는 소속사 대표 등과 함께 선수들이 사용하는 호텔을 찾았다가 예정에 없이 딸을 만나게 된 겁니다. 순간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두 모녀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느라 바빴습니다.
이제 본선 한 경기만 남았습니다. 이 경기에선 포디움에 나서는 손연재도, 관중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도 긴장을 덜고 경기 자체를 즐기고 싶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메달 도전에 대해 욕심이 나긴 하지만, 손연재한테 그런 부담은 주고 싶지 않습니다. 후회 없이, 아쉬움 없이, 준비한 것만큼의 연기를 모두 쏟아내고 나오길 바랄 뿐입니다. 손연재의 나이 이제 겨우 열아홉 살입니다.
From 런던 이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