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중국남성 4명이 나를 덮쳤다 3월 29일
▲ 북한 인권운동가 김영환 씨가 <일요신문>과 2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가졌다. 114일간 강제구금의 끔찍한 기억들을 상기하는 김 씨의 표정.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본지는 김 씨와의 장장 2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 입국에서부터 114일간의 구금과 극적인 귀국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본지는 김 씨의 동의를 얻어 인터뷰를 통해 구술한 내용을 토대로 ‘육성수기’를 구성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어가고 있다. 외로운 이국땅에서 114일간 겪었던 아픔의 상처가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에 남은 고문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마음 속 깊게 패인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밝히는 모든 진실은 나의 아픔과 울분을 달래는 단순한 호소가 아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세상에 내가 겪은 아픔에 대한 진실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사건을 직접 겪고 힘써준 모든 당사자,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옳다고 판단했다. 조심스레 당시 이야기를 차례차례 꺼내 본다.
2012년 3월 23일. 난 당시 베이징공항을 통해 중국에 입국했다. 애초 언론에는 내가 처음부터 대련으로 입국해 화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입국 후 첫 3일은 베이징 현지에서 활동하는 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가 대련에 입도한 것은 3월 27일 오전이었다. 전날부터 밤기차를 타고 새벽 내 이동했었다.
당시만 해도 내가 중국에서 끔찍한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단지 얼마 전부터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나를 비롯해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재길 강신삼 이상용 중 한 명을 지목해 추적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돼 신경을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며칠 동안은 별다른 낌새도 없었다.
대련에서는 중국 현지 활동 경력 13차 유재길과 10년차 활동가 강신삼을 만났다. 막내 격인 이상용은 당시 대련이 아닌 단동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나와 평소에도 호형호제하며 깊은 친분을 두고 지내던 후배들이었다.
외부에서는 지금도 내가 특별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심지어 국가정보원과 연계된 정보활동설이나 북한 고위급 인사의 기획탈북설 등 근거 없는 루머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내가 대련에서 이들과 만난 것은 특별한 프로젝트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현지에서 활동 중인 활동가들을 만나 격려하고 현지 활동에 대한 보고받기 위해서였다.
대련에 입도하고 ○○호텔에서 이들과 몇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에서는 현지 활동보고를 통해 도움과 지원이 필요한 부분을 체크하고 북한 인권활동과 관련한 남북한 및 국제정세에 대해 토론하는 게 주를 이루었다. 회의가 끝나고는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 못 나눴던 회포를 풀기도 했다.
또 한 가지 대련 현지에서 한 일이 있었다면 활동가들에 대한 체력검사였다. 아직까지 이에 대해 외부에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중국 현지 활동 자체가 극심한 심적·체력적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이를 위해 활동가들은 평소에도 체력을 길러 놓고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나는 당시 후배들과 함께 호텔 인근 운동장으로 나가 몇 차례 체력검사를 실시했다. 그때까지는 정말 모든 것이 평온했다.
일이 벌어진 것은 대련에 도착하고 이틀 뒤인 3월 29일이었다. 나는 당시 8시 반쯤 호텔에서 나와 또 다른 한국 활동가들과 만나기 위해 제3의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당시 입수된 정보로 인한 불안감도 있었고 평소에도 보안적인 문제를 각별히 신경썼던 터라 호텔에서 나와 별도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호텔 앞에서 택시 한 대를 잡아탔다. 택시에는 이미 또 다른 손님 한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합승을 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그 택시를 탄 순간이 자유를 허락한 마지막 시간이 될 줄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10분이나 지났을까. 앞서 탑승한 승객이 하차를 하던 중이었다. 그 순간 중국 안전부 요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 네 명이 택시를 막아섰고 나를 덮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마도 호텔 앞에서부터 나를 미행했던 것으로 보였다. 요원들은 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혁대를 풀어, 내 손을 결박하고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 씌워 차에 태웠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나와 제3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한국 활동가들은 낌새를 채고 이미 중국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끔찍한 중국 감금기의 시작이었다. 요원들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첫날 호텔방에서 진행된 조사에서는 기본적인 나의 신분과 한국에서의 활동, 중국여행목적, 함께 체포된 유재길, 강신삼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고 난 기본적인 대답을 했다. 당시만 해도 난 상황파악이 전혀 안됐기 때문에 유재길 등 일행이 나처럼 안전부에 의해 체포된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체포된 순간 공포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우리의 활동이 외부에 발각됐다는 절망감과 실망감이 더 컸다. 개인적 두려움보다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앞섰다.
그렇게 호텔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인 3월 31일 아침, 요원들은 또다시 나에게 복면을 씌우고 결박한 채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당시 시계를 볼 수는 없었지만 대략 3~4시간 정도가 소요된 듯 보였다. 도착한 장소는 안전부 수사국 소속 사무실인 듯했다. 도착해보니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4일 동안은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며칠 뒤, 요원들의 영장청구서를 커닝하고 나서야 이곳이 단동수사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사국 조사실은 내가 예전에 조사를 받았던 안기부 조사실과 크기와 구조면에서 매우 흡사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한국과 달리 중국 조사실 내에는 변변한 침대 하나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단동으로 넘어오고 첫날 3시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를 맡은 요원은 다짜고짜 내게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실토하고 진술하라”고 윽박질렀다.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무조건 모든 것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난 내가 무슨 죄목으로 끌려 왔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게 진술만 강요할 뿐 나의 체포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체포되기 전 북한 보위부가 우리들 중 한 명을 타깃으로 삼아 쫓고 있다고 입수한 정보가 번뜩 떠올랐다. 나는 요원에게 북한 보위부의 개입 여부에 대해 물었다. 요원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내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북한 보위부에서 우리에게 테러범에 대한 정보를 줬다. 몇 달간 추적 끝에 보호 차원에서 당신들을 체포했다”라고 밝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보호 차원에서 우리를 체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몇 달 동안 우리를 추적하고도 체포하지 않았던 것은 인적 네트워크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끈 것 같았다. ‘북한 개입’ 여부는 사실이었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당한 절차에 의해 체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굳이 그들의 진술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들에게 변호사와 영사접견을 요구했다. 그 전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맞섰다. 그들은 내게 변호사 접견은 허락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영사접견은 상부에 통보할 테니 기다리라고만 설명했다.
특히 영사접견에 대해서 그들은 “일반적인 외교 절차에 따르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영사접견 포기각서를 쓰고 기다린다면 아무 일 없이 풀어줄 수 있다”며 회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완벽한 속임수였다. 나와 함께 체포된 동지들 역시 이와 비슷한 회유를 받고 이에 응해 영사접견 포기각서를 썼지만 풀려나지 않았다. 중국이 한국 영사접견을 방해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그들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고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조사 초기부터 그들은 각종 회유와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한 요원은 내게 “끝내 진술을 하지 않을 경우 이번 사건과는 상관없는 너의 중국 현지 친구들과 친척들까지 수사국으로 불러내겠다”며 치졸한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조사 이틀째까지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자 그들은 약이 오를 때로 올라 있었다. 급기야 조사 이틀째부터 끔찍한 고문이 시작됐다. 운동권 시절 안기부 고문에 이력이 난 나지만, 중국 안전부의 고문은 순간적인 고통만 따지자면 한국 안기부보다 훨씬 강도가 심했다. 고문기술도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능숙하기까지 했다.
처음 내가 받은 고문은 일명 ‘수갑고문’이었다. 팔을 뒤로 젖힌 채, 손목에 피가 통하지 못하게끔 꽉 조여 놓는 고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그렇게 11시간 동안 고문은 지속됐다. 그 시간 동안은 음식물은커녕 물조차 먹을 수 없었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한 번 걸린 마비는 수갑이 풀리고도 한 달이 넘도록 풀리지 않았다. 손등 주변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 뒤로도 요원들은 나에게 수시로 수갑을 채웠다.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도 수갑을 채워 고의적으로 수면을 방해했다. 조사 기간 내내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4월 10일부터 15일까지는 그 악명 높은 ‘잠 안 재우기’ 고문이 실시됐다. 고문을 받는 5일 동안 단 1초의 수면도 허락되지 않았다. 요원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감시했고 잠이 들 찰나마다 나의 몸을 흔들었다. 5일 동안 2~3초 존 것도 2~3번이 고작이었다.
더욱이 난 전기고문은 당시 처음 받아봤다. 아마도 이 고문은 5~8시간 정도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계속됐고 내 살타는 냄새까지 직접 맡을 수 있었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중국 당국에 대한 원망이 치솟아 올랐다. 그 이전부터 중국의 경제성장과 국제적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던 나인데 내가 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나의 고문을 전담했던 고문관 요원 A가 떠오른다. A는 내 또래로 보이는 요원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덩치가 매우 좋았고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 괴력으로 나를 구타했고 전기봉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지져댔다. 다 지난 일이지만 A의 끔찍한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그렇게 회유와 협박, 고문으로 이어지는 조사는 4월 28일까지 계속됐다. 고문 이후 내가 어느 정도 활동사항에 대해 진술하자 조사를 마무리 짓는 분위기였다. 조사가 끝나기 이틀 전인 4월 26일, 수사국에서 처음 영사와 접견이 허용됐다. 영사와의 접견은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기본적인 상황파악만 분주하게 교환됐을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난 영사에게 넌지시 수사국 내 고문에 대해 전달했다.
4월 28일, 나는 단동 구치소로 넘어갔다. 구치소 수감 직전 한 차례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야말로 몸은 말이 아니었다. 직접 몸무게를 재볼 수는 없었지만 체중이 대략 10kg 정도 빠진 것 같았다. 요원들이 직접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넌지시 들어보니 최고혈압이 200까지 올라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나의 몸 상태가 심각했던지, 요원들은 혈압체크 뒤 CT촬영까지 실시했다.
단동 구치소로 이감되고 나서야 난 유재길 등 동지 3명이 나와 함께 구치소에 이감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구치소 교도관 컴퓨터를 슬쩍 훔쳐보고 나서야 나의 적용 혐의가 ‘국가안전위해죄’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국가안전위해죄’. 처음에는 이 법에 대해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만큼 생소했다. 감방에 수감되고 며칠 뒤, 다른 수감자의 형법 책을 빌려보고 나서야 그 법이 국내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일종의 공안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활동이 중국에 위해한 행위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다. 그 뒤 나는 여건상 본격적인 재판준비를 진행할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진술할 말들을 반복적으로 되뇌곤 했다.
하루 일과도 빠듯하기 그지없었다. 오전 5시 반 기상을 시작으로 오후 7시 반까지 중간 중간 10분간 하루 세끼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3시간 동안 중노동이 계속된다. 감방 내 노동은 주로 장식품이나 조화 수공업이었다. 평소 해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손에 설익었고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매일 새벽마다 불침번을 섰기 때문에 수면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 세 끼 제공되는 감방 내 식사도 형편없었다. 식사 때마다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은 찐빵 하나와 멀건 국이 나왔다. 원래 위가 좋지 않았던 터라 식사속도가 더딘 편인데 감방 내에서 허용되는 식사시간은 10분에 불과했다. 결국 한 끼에 찐빵 반개 먹기가 어려웠다. 감방 내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였던 방장은 내가 식사를 늦게 할 때마다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감방에는 다양한 수감자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사형이 유력시되는 마약사범은 물론, 뇌물 수수범, 밀수범, 절도·강도범 등 각양각색이었다. 모두 중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수감 초기에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중국어가 능통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비속어와 사투리가 뒤섞인 그들의 대화에 끼기조차 어려웠다.
무엇보다 수감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절대적인 고립감이었다. 예전 한국에서의 수감생활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신교환은커녕 외부인 접견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감 뒤 1~2주가 지나고서부터는 이러한 고립감 때문에 절대적인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아들 걱정에 뜬눈으로 지새울 어머니의 얼굴과 아내와 자식들 생각에 정신적 고통이 엄습했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볼 동지들 생각에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나의 미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외부와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됐기 때문에 나의 현재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다.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계속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석방되기 한 달 전에는 감방 전체가 새로운 건물로 이사를 가, 그나마 나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료 수감자들과도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 중 몇몇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동료 수감자 B는 사업파트너와의 불화로 절도죄를 저질러 감방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사실상 경제사범이었기 때문에 자신 소유의 부동산과 돈이 꽤나 많아 보였다. B는 내게 먹을 것을 가장 많이 사준 동료였다. B 덕분에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하는 북한인권활동에 많은 공감을 표시하며 힘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이 밖에도 국영기업 재직 당시 횡령죄를 저질러 수감된 70대 노인 C 역시 나에게 심적·물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던 분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수감생활 113일째 되던 7월 19일. 교도관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내가 내일 풀려날 것이라는 희소식이었다. 지금까지 일도 그랬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다음 날인 7월 20일 아침. 나는 드디어 감방에서 나와 22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는 한국의 경비교도대에 해당하는 무장경찰 부대가 나를 결박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순간조차도 그들은 내 얼굴에 복면을 씌워 마지막까지 공포감을 조성했다.
공항에 가서야, 함께 수감된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공항에서는 요녕성 국가안정청 간부 2명과 한국 영사 2명이 각각 나와 있었고 간단한 인계식이 진행됐다. 안정청 간부 한 명이 우리에게 “당신은 국가안전위해 행위를 했지만 안전부 승인에 의해 돌려보내며 중국에서 추방되면 이 곳에 다시 올 수 없다”는 내용의 결정문을 읽어줬다. 무죄석방이 아닌 불기소처분과 다름없었다.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겪었던 고통과 치욕의 순간이 떠올랐다.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당신들은 내가 조사과정에서 겪은 고문행각에 대해 이 자리에서 당장 사과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안정청 간부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그 간부는 상당한 직책이 있는 여성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할 얘기가 있으면 한국에 가지 말고 남아서 함께 토론해봅시다.”
사실상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거기에 대해 “당신들에게 나의 요구는 명확히 전달됐소. 토론할 필요는 없소”라고 거부의사를 밝혔다.
▲ 김영환 씨가 지난 7월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 공안당국의 구금 당시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114일간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나의 요구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묵묵부답이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들의 사과가 있기까지는 아마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이번 일을 겪고 나의 미래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모든 초점이 중국의 인권유린에 맞춰지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가 한국과 중국에서 진행했던 북한인권 활동이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중국 현지 활동 자체는 어려워졌지만 지금까지 해온 북한인권 활동은 변함없이 계속해 나갈 것이다.
구술 감수=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김영환 씨의 안면 MRI. 화살표가 가리키는 광대뼈 부위에 세포 손상에 의해 검게 표시된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다. 연합뉴스 |
전면부인 중국에 꼼짝 못할 증거를
김영환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다음 날인 지난 8월 8일, 전북 전주시 삼성병원에서 고문사실 입증을 위해 검사를 받았다. 병원 측은 자기공명촬영(MRI) 정밀검사 결과, 눈과 광대뼈 사이에 위치한 근육 일부에 외부 압력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흉터조직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상처 조직이 실제 고문에 의한 증거인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는 조만간 보다 정밀한 추가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검사를 받고 다음날 기자와 통화한 김 씨는 “고문 흔적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고 후유증으로도 나타날 수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만약 향후 정밀검사를 통해 김 씨의 고문 흔적이 공식적으로 입증 된다면 중국 측에 항의를 하고 있는 정부 당국의 입장에 보다 힘이 실릴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8월 8일,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선진통일당 등 3당은 ‘김영환 등 한국인 4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고문 등 가혹행위 의혹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 촉구 결의안’을 공동발의하며 중국 당국을 압박했다.
현재까지 중국 측은 김 씨의 고문의혹에 대해 전면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지난 8월 3일, 중국 외교부 장밍 차관보는 이규형 주중 한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김 씨의 조사를 진행했으며 인도적으로 대우해 줬다. 석방은 양국 우호관계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선처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외교부는 8월 8일 공식회견을 통해 현재 해외에 수감 중인 한국인 수는 1169명이며 중국에 약 346명이라고 밝혔다. 또한 외교부는 오는 10월까지 이들과의 면담을 실시할 예정이며 현재까지 14개국 175명 해외수감자와의 영사면담을 실시한 결과 일부 인권 침해와 관련한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