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이 뒷받침돼야 최고가 될 수 있다”
▲ 한국 축구의 올림픽 동메달은 홍명보 감독이 늘 강조한 ‘팀 스피리트’의 승리였다. 일본전에서 완승을 거둔 후 시원한 생수세례를 받고 있는 홍 감독. 연합뉴스 |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축구대표팀이 11일 오전(한국시간)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런던올림픽 축구 3-4위전에서 2-0 완승을 거뒀다. 이로써 한국은 1948년에 처음 출전한 이래 64년 만에 올림픽 축구 메달을 따냈다. 아시아에서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 이후 44년 만의 일이다.# 팀
런던올림픽에서의 퍼포먼스로 한국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올라선 홍명보 감독이 늘, 그리고 꾸준히 유지해온 기조는 바로 ‘팀 스피리트(팀 정신)’였다. 절대로 개인이 팀보다 앞설 수는 없었고, 팀을 최대 무기로 여겨왔다. 이름값, 네임밸류는 홍명보호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제 아무리 ‘스타’라 하더라도 선수단 내 융화와 조직력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엔트리에서 제외했고, 심지어 후보군으로조차 분류하지 않았다. 물론 워낙 말 많은 축구계에서 이러한 홍 감독의 뚝심은 불필요한 오해도 낳았으나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우린 팀으로 승부해야 한다. 이게 깨지면 제대로 설 수 없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위치와 한계는 분명하다. 스타라고 해도 한국의 기준이다. 외부에서 볼 때, ‘그저 그런’ 선수들 중 한 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직이 갖춰지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
이와 함께 예의도 강조했다.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은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장소와 때를 구분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인사할 것을 요구했다. 바로 홍 감독이 현역 시절부터 새겨온 ‘내 위상은 내 행동에 달려있다’는 철학을 전수한 것이다.
효과가 있었다. 그래도 또래들 가운데 한국 최고 선수라고 자부해온 제자들이 스타의식을 내려놓는 데 큰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18명의 최종엔트리 와일드카드(24세 이상 선수)로 선발된 골키퍼 정성룡(수원)과 오른쪽 풀백 김창수(부산)는 “독특한 규율 문화가 있다. 자율적인 듯하면서도 엄격한 (홍명보호만의) 특징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런 규율과 규칙이 홍명보호를 끈끈한 ‘팀’으로 엮었고, 그라운드에서 그 효과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 일본전 승리 후 라커룸에서 기쁨을 만끽하는 선수들. 출처=기성용 트위터 |
재미있는 사실은 3년 전부터 지금까지 ‘홍명보호’ 스쿼드에 눈에 띄는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시기별 각각의 상황에 따라 일부 멤버들의 얼굴이 바뀌기는 했어도 비슷비슷했다. 일종의 의리였다. ‘한번 뽑은 제자는 영원한 제자’라는 것. 이 때문에 올림픽 최종 엔트리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선수를 선발하는 것보다 선수를 내쳐야 하는 사실 탓에 너무도 힘겨웠다”고 코멘트를 한 것이 더욱 진솔하게 다가왔다.
홍 감독의 남다른 ‘의리’에 얽힌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익히 알려진 얘기지만 사실 홍 감독은 일찌감치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작년 말 2014브라질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의 부진을 이유로 국가대표팀 조광래 전 감독을 전격 경질한 대한축구협회가 대표팀 새 사령탑 1순위에 올린 이가 바로 홍 감독이었다. 그러나 과감하게 포기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직 지도자로서 자신의 내공이 부족하다고 여긴 탓도 있었지만 그동안 함께해온 제자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훨씬 컸다.
결과적으로 홍 감독은 제자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너희(선수)들과 런던까지 함께하겠다는, 그리고 그곳에서 후회 없이 싸워보겠다는….’
▲ 일본전 종료휘슬이 울리자 그라운드로 뛰어나가는 홍명보 감독. 연합뉴스 |
모나코공국으로부터 장기 체류권을 얻은 사실이 불거지며 병역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던 박주영(아스널)을 먼저 끌어안은 이도 홍 감독이었다. 제자가 불리할 때, 그리고 필요하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병역과 관련한 박주영의 해명 기자회견에 참석해 홍 감독은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박)주영이는 반드시 병역을 정상적으로 해결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대신해서라도 군대에 가겠다.”
물론 홍 감독이 대신 군대에 갈 수 없다. 제3자가 특정인을 위해 병역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없다. 그래도 궁지에 내몰린 박주영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건 분명했다. 최강희 현 국가대표팀 감독이 어느 정도 선발이 전제가 된 해명의 자리를 요구했을 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행동으로 더 악화됐던 여론도 다소 수그러들었다.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이 4강에 올라간 동안 스위스와 대회 조별리그 2차전(2-1 승)에서 헤딩골을 넣은 걸 제외하면 뚜렷한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해 따가운 시선은 계속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불편한 질타만 이어진 건 아니었다. 따스한 격려도 갈채도 그를 함께 향했다. 박주영에게는 홍명보라는 방패막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홍 감독의 신뢰를 한일전의 골로 입증해 보였다. 아마 박주영한테는 축구 인생 중 가장 잊지 못할 골로 기억될 것이다.
# 최선
런던올림픽에서 홍명보호의 목표는 당연히 메달 획득이었다. 이미 성인 무대에서 최강의 자리에 오른 브라질조차 우승을 천명한 뒤 대어들을 와일드카드로 대거 끌어들인 마당에, 어쩌면 한국 축구가 8강 이상을 바라보는 건 상당히 힘겨운 미션이었다. 더욱이 조별리그 때 상대한 국가들도 결코 쉽지 않았다. 멕시코도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가봉 역시 아프리카 다크호스로 충분히 예선 통과를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영국 단일팀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등 빅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멤버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홍명보호에는 그 이상의 목표가 존재했다. 최고가 아닌, 최선의 법칙이었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맺고, 흘린 땀방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에서 비롯됐다.
“최고가 되는 건 먼저 최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선수들에게 항상 이를 주지시켰다.”
광저우아시안게임의 기억도 있었다. 당시 홍명보호는 결승 문턱에서 좌절하면서 3~4위전으로 밀렸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큰 메리트가 없었다. 국내 스포츠 선수들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사활을 거는 건 명예도 있지만 병역 면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이는 엄청난 부담이다. 한데 올림픽과는 달리, 아시안게임은 우승이 아니면 무용지물이다. 그럼에도 홍명보호는 달랐다. 거의 패했던 경기를 종료 직전 극적으로 뒤집었다. 당시 결승행 좌절 이후 홍 감독은 제자들의 눈물을 봤다. 그만큼 가슴을 짓눌러왔던 병역의 압박과 무게였다. 그러나 어린 태극전사들은 메달 이상의 가치를 위해 뛰고 또 뛰었다.
런던올림픽도 다르지 않았다. 과정과 상대, 장소는 바뀌었어도 중압감은 같았다. 대신 보다 밝아졌고 편안해졌다. 영국 단일팀을 제압한 뒤 경기장 팀 라커룸에서는 김광석의 명곡 ‘이등병의 편지’가 흘러나왔다. 동메달을 확정 지은 후에도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메달 이상의 가치를 향해 ‘최선’을 기울인 홍명보호의 퍼포먼스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 연합뉴스 |
2012년 8월 11일 아침,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축구 열기가 가장 뜨거운 나라였고, 사람들의 몸속에는 아드레날린이 넘쳐흘렀다. 오늘 아침,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한국과 일본의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축구 동메달 결정전 경기는 뜨거웠던 지난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을 재현시키기에 충분했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SNS에서는 “오늘 경기를 이겨서 올림픽 메달을 꼭 따줬으면 좋겠다” “박주영이 골을 넣어줬으면 좋겠다” “이번 대회에서 한 골도 못 넣어 속상하다는 구자철이 이번에는 골을 넣어줬으면 좋겠다” “아직 1분도 뛰지 못한 김기희의 교체출전도 보고 싶다” 등등 대표팀을 향한 국민들의 바람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이 바람이 현실로 이뤄지다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박주영이 선제골을 넣었고, 구자철이 추가골을 넣었다. 후반 43분에 김기희가 교체멤버로 피치 위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겼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당당히 따냈다. 우리가 꿈꿨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2002년 6월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꿈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일본의 축구팬들과 네티즌들은 오늘의 패배를 한국의 병역 면제 혜택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병역 면제 혜택은 우리 선수들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선수들로 하여금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함께 심리적 부담감을 안겨줘 개개인의 플레이를 위축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다. 따라서 병역 면제가 오늘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수백 개의 반박자료들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우리 선수들의 기량과 노고를 깎아내리려는 이런 의견들에 대해서 일일이 반박하고 싶지 않다. 경기를 통해 나타난 선수들의 모습은 상대 진영의 강한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경기 직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본 축구를 ‘아름다운 축구’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90분 내내 경기를 지배하고,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한 쪽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었다.
오늘 경기는 지난 1954년 3월에 열린 첫 번째 한일전 이후, 통산 76번째 한일전이었다.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면 언제나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일본에게 지면 돌아오지 말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라”라는 말로 대표되듯이, 우리는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면 한편에서는 “경기 그 자체를 즐겨라”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한테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주문을 건다. 게다가 오늘 경기는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한일전 사상 최고의 빅매치이며,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경기”라고 주목해 온 탓에 자칫 지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국민적 비난과 실망까지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인 대표팀도 아니고, 23세 이하의 어린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올림픽 대표팀한테 견디기 힘든 이런 중압감을 준 게 미안해서였을까? 전반 42분, 박주영이 일본의 오기하라의 팔꿈치에 맞아 눈밑이 찢어져 피를 흘리고 쓰러졌을 때, 후반 37분, 박종우가 일본의 오쓰의 높이 쳐든 발에 얼굴을 맞고 피치 위를 뒹굴 때 등등 우리 선수들이 넘어지고, 잔디 위를 구르며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골로 인한 기쁨과 환희는 어느새 사라지고 안타까움만이 가슴에 남았다.
또 일본이 거친 플레이로 일관했던 후반 20분경 이후부터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남은 시간을 1분 단위, 1초 단위로 세기 시작했고, 우리 선수들이 잔디 위에 쓰러질 때마다 “다치지 마!”라는 말을 주문처럼 곱씹으며 선수들의 파이팅을 독려했다. 그리고, ‘신아람의 펜싱 1초’처럼 흘러가던 시계의 초침이 마침내 후반 추가시간 3분을 다 채웠을 때, 한국 축구는 100년에 한번 성사될까 말까한 한일전을 승리로 마감했고, 대한민국 전역은 승리의 기쁨과 감동으로 환호했다.
오늘의 승리는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명승부로 기억될 것이며, 18명의 태극 전사들은 한국 축구의 전설로 남을 것이다. 더불어, 지난 2002년 6월 이후, 한국 축구가 발전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했던 것처럼 오늘의 이 승리는 향후 한국 축구 발전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것이다. 체력이 모두 고갈된 상태에서도 ‘투혼’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최선을 다해준 우리 선수들에게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또,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꿈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18명의 태극전사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고맙다! 한국축구, 사랑한다! 홍명보호.
이종훈 MBC 축구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