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55>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서울 경복궁에 가면 고궁박물관 한편에 서있는 지광국사(智光國師)현묘탑(고려시대 지광국사의 사리를 모심)을 볼 수 있다. 본래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에 있던 것인데 경술국치 직후 일본 오사카에 강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탑신의 앞면과 뒷면에 문짝과 자물쇠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사리를 모셨으니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경고다.
자물쇠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백제 시대 유물에서도 열쇠가 출토됐다.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 풍납토성에서 나왔는데 약 475년께 백제의 왕족, 귀족들이 잠금장치로서 자물쇠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물쇠는 역사적으로 사원이나 국가지배층의 집, 제사를 지내는 시설, 성문, 성안의 무기창고, 곡식창고에 자주 사용되었다. 가정에서는 함, 장, 농, 경대, 책장, 찬장, 돈궤, 뒤주, 곳간, 대문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자물쇠를 사용했다.
서양이 열쇠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발달했다면 동양에서는 자물쇠를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열쇠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열쇠는 권력을 상징한다. 가둘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힘이다. 서양 역사에서 점령당한 도시 영주는 정복자에게 열쇠를 건네준다. 가둘 수도 풀 수도 있는 권력을 이양하는 셈이다. 서양에서 열쇠는 복잡하고 화려하다. 행운의 열쇠는 거기서 나왔다. 그렇다면 자물쇠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자물쇠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장식도 화려했다.
선조들이 만든 자물쇠는 기능적 측면에서도 뛰어났다. 단순히 일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단번에 열리는 것도 있지만 8단계를 조작해야 열리는 첨단 잠금장치도 있었다. 열쇠구멍이 숨겨져 있어서 찾아야 하고 열쇠는 넣었다가 다시 빼내야 열리는 자물쇠도 있다. 열쇠를 일정한 각도로 움직여야 끼울 수 있어서 주인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열 수 없다. 두 개의 열쇠를 순서대로 맞추고 특수 조작과정을 거쳐야 열리는 비밀자물쇠도 있다. 그러니까 옷핀으로 어떤 자물쇠도 열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라도 조선시대의 비밀자물쇠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옛 자물쇠를 여는 실험을 해보았는데 10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8단 자물쇠를 열었다고 한다.
▲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
자물쇠의 모양을 물고기, 용, 박쥐, 대나무 등의 형태로 만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고기는 기운차고 밤에도 눈을 뜨고 자기 때문에 지키는 일에 알맞다. 또 물고기가 용이 된다고 믿었으므로 출세와 득남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용 모양의 자물쇠는 궁중에서 널리 쓰였다. 대나무 마디 모양의 자물쇠는 문서함 등에 붙여 선비의 기품을 나타냈다. 또 밤눈이 밝아 집을 지켜주는 수호의 상징으로 박쥐의 모양을 본뜬 자물쇠가 있다. 함박자물쇠(일명 배꼽자물쇠)는 몸통 앞쪽에 열쇠구멍을 냈다.
장식도 뛰어났다. 가구용 자물쇠는 가구에 부착된 다른 장식들과 조화를 이뤘다. 조선시대 때 장인(匠人)인 두석장(豆錫匠)이 가구의 장식과 함께 제작했다. 예컨대 서재의 가구에는 그을음 처리를 한 거멍쇠장식(검정색 쇠장식)을 썼는데, 이때 자물쇠도 황동을 쓰지 않고 검은 시우쇠(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든 쇠붙이)로 만들었다. 은근한 분위기와 자연미를 최대로 살렸다. 자물쇠를 만드는 장인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명장으로 추앙받았다.
이처럼 자물쇠는 기능에서도 뛰어났고, 조상들의 생각과 문화가 숨 쉬고 있으며,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녔다. 전자식, 지문인식, 홍채인식 자물쇠가 넘치는 세상이다. 이들 자물쇠가 따라오지 못하는 기능과 문화와 문양이 풍부한 우리의 자물쇠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