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은 넘었지만 편견 앞에 무릎 꿇다
▲ 우피 골드버그(오른쪽)와 테드 댄슨, 흑인 코미디 스타와 백인 시트콤 스타의 사랑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깨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1985)로 오스카 후보에 올랐고 <사랑과 영혼>(1990)으로 드디어 트로피를 거머쥐었으며 <시스터 액트>(1992)로 대박을 기록했을 당시, 우피 골드버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스타였고 가장 빛나는 엔터테이너였다. <시스터 액트 2>(1993)로 흥행 세를 잇던 그녀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1993)라는 코미디에 출연한다. 크게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고 평단의 반응도 미지근했지만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건 이 영화에서 우피 골드버그와 상대역인 테드 댄슨 사이에 일어났던 로맨스 때문. 당대를 풍미하던 흑인 코미디 스타와 백인 시트콤 스타는 현장에서 사랑에 빠졌는데 테드는 애처가 이미지 강하던 유부남이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어떨 땐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우피 골드버그는 18세 때 첫 결혼을 했다. 난독증 때문에 한 달도 안 되어 고등학교를 포기한 그녀는 학업을 등지고 히피들과 어울렸으며, 결국은 틴에이저 시절 마약에 의존해 살아가게 된다. 마음을 다잡고 재활 클리닉에 들어간 그녀는 카운슬러였던 앨빈 존슨과 1973년에 결혼해 그 다음 해 딸을 낳고 1979년에 이혼한다. 두 번째 결혼 상대자는 촬영감독인 데이비드 클래센. 1986년에 결혼해 1988년에 이혼했다. 이후 우피는 유명한 그래픽 노블 작가인 앨런 무어,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티모시 달튼 등과 연인이었다. <컬러 퍼플> 때 만난 흑인 스타 대니 글로버와 사귄 적도 있지만, 그녀의 남편과 연인은 모두 백인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랜디 고쉬와 1970년에 결혼해 7년 만에 헤어진 테드 댄슨은 이혼 후 심란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신 훈련 운동인 EST의 세미나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만난 케이시 코테스라는 10세 연상의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전직 댄서이며 환경주의 디자이너인 코테스와 1977년에 결혼한 테드는 어느덧 30대에 접어들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한 무명 배우. 혈압이 높으니 집에서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생계를 위해 만삭에도 직장을 다니던 케이시는 갑작스럽게 출산을 하던 중 심각한 뇌졸중 증세를 겪었고 한 달 후엔 전신 마비 증세를 겪는다. 이후 테드는 연기 생활과 함께 육아와 간병을 하며 2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 보답이었을까?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진 시트콤 <치어스>에서 섹시한 바람둥이 샘 말론 역을 맡은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때 테드는 우피를 만났다. 사실 우피에 대한 테드의 호감은 1990년 아세니오 홀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부터 드러났다. 홀은 테드에게 “모든 여성 코미디언들이 우피처럼 못 생긴 건 아니다”고 하자, 테드는 정색을 하며 홀의 잘못을 지적했고 “우피는 매우 섹시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 그러면서 우피와 함께 영화를 찍고 싶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 현장의 테드와 우피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핑크빛 무드에 대해, 대중은 처음엔 콧방귀도 안 뀌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파파라치 사진이 이어지고 그들이 멕시코의 휴양지 티후아나에서 주말을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는 심각해졌다. 테드의 아내 케이시가 별거를 요구하며 LA의 한 클리닉에서 정신 치료를 받았고, 우연히 테드의 소지품에서 우피가 보낸 사랑의 쪽지들을 발견하자 이혼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화를 자초한 건 테드와 우피 본인들이었다. 쇼 비즈니스의 유명 인사들이 모인 ‘프리아스 클럽’은 1993년 10월 8일 뉴 힐튼 호텔에서 우피를 위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3000여 명이 참석한, 전통 의상을 테마로 한 파티였다. 이때 턱시도에 톱 햇을 쓰고 단상에 오른 테드는 검은 얼굴에 흰 립스틱을 칠한 분장을 하고 있었다. 조크를 시작한 그는 계속 ‘깜둥이’(nigger)라는 단어를 썼고, 우피와의 성적 관계를 적나라하게 얘기했으며, 게걸스럽게 수박(흑인을 비하하는 음식)을 먹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눈살을 찌푸렸는데 단 한 사람만 즐거워했다. 바로 우피 골드버그였다.
이후 그들은 TV 연예 프로그램에 함께 나가 단지 유머였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문제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그때까지 18개월 동안 사귀면서 수많은 인종주의적 비방에 시달렸지만, 이 사건 이후엔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 우피는 “너희들이 아이를 낳으면 난 그 아이를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고, 테드의 집 잔디밭엔 KKK단의 상징인 화형을 위한 십자가가 박혀 있기도 했다. “너를 죽이러 지금 가고 있다”는 협박 전화에 황급히 집을 떠나던 테드는 폐차 상태까지 가는 자동차 사고를 내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11월 5일에 헤어졌고,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
우피와 테드의 짧은 로맨스는 미국의 보수층이 지닌 인종주의를 강하게 자극하는 사건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 우피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테드와의 일은, 정말로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다른 어떤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건 정말로 마음 아픈 일이다. 진정한 우정을 잃게 된다는 것, 그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이후 테드는 여배우인 메리 스틴버그와 결혼해 현재까지 살고 있고, 우피는 한 번 더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이혼하고 지금까지 화려한 솔로 생활을 즐기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