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작 줄줄…‘문학계 G스폿’ 건드렸다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
여주인공 스틸이 그레이와의 정사 장면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와 ‘천상의 목소리’는 16세기 영국의 종교음악 작곡가인 토마스 탤리스의 ‘그대 외에 바람 없도다(Spem in alium)’라는 합창곡이다. 소설의 성공 덕분에 이 노래가 수록된 음반 판매량은 현재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태.
이처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인기를 얻으면서 덩달아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래식 음악이다. 이유는 소설 속 억만장자인 그레이의 은밀한 취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클래식 음악 감상이라는 점, 그리고 그레이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스틸의 몸 위를 능수능란하게 더듬는 묘사 등이 독자들로 하여금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속에 등장하는 클래식 음악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얼마 전 음반회사인 EMI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15곡의 클래식 음악으로 이뤄진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체르토 2번, 파헬벨의 캐논 D장조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작가인 제임스가 직접 선곡한 곡들이다.
한편 상상 속의 ‘아나스타샤 스틸’ 대신 현실 속에 존재하는 진짜 ‘아나스타샤 스틸’의 경험담을 소재로 한 책들도 등장했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눈가리개를 하고, 깃털로 몸을 간질이는 등 짜릿한 경험을 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픽션이 아닌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고 있다.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출판 업계에서는 에로틱 소설 출간 붐이 일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트리핑다운>, <루이자 메이의 50가지 그림자>, <복종의 일기>, <토우프의 몇 가지 그림자>.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영감을 얻은 패러디 작품도 쏟아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제목부터 엇비슷한 <얼 그레이의 50가지 수치심>이다. 언뜻 표지만 봐서는 원작과 헷갈리기 십상인 이 작품은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조롱하고 있다.
패니 머킨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앤드류 셰퍼의 작품이며, 여주인공 안나 스틸이 얼 그레이라는 남성에게 빠져서 집착한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크리스천 그레이’처럼 주인공 그레이 역시 자신만의 은밀한 취향을 갖고 있지만 그 취향이란 것이 다소 우습다. 가령 톰 크루즈 광팬이라거나 BDSM을 즐기지만 여기서 말하는 BDSM은 결박-지배-사디즘-마조히즘 등 변태 성행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갑옷, 용, 주술, 마법 등을 말한다.
<토우프의 몇 가지 그림자> 역시 원작을 패러디한 소설이다. 알렉산드라 앨러미넘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 아칸소주 최고의 부자인 남주인공 페이건 토우프가 결국 앨러미넘을 자신의 섹스 노예가 되도록 설득해 함께 섹스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코트 버백의 작품으로 표지에는 ‘솟구치는 감정과 하드코어 섹스의 로맨틱하고 다정한 이야기’라고 적혀 있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다른 점은 주된 대상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데 있다. 이에 대해 버백은 <인디 스포트라이트>와의 인터뷰에서 “내 소설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남성판”이라면서 “때문에 책 속에 등장하는 음담패설과 유머 역시 모두 남성 독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로틱 소설인 만큼 성생활과 관련된 아류작도 있다. <50가지 즐기는 방법: 친절한 사람들을 위한 BDSM>은 ‘카마수트라의 50가지 그림자’라고 불리는 책으로 ‘여러분의 섹스 라이프를 보다 즐겁게 해주는 방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부부 작가인 데브라와 돈 매클라우드가 제안하는 팁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부부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이밖에 <루이자 메이의 50가지 그림자: 고상한 섹스에 대한 회고록>은 소설의 여주인공 때문에 더욱 충격적인 작품이다. 책 속에서 호색한으로 묘사된 여주인공이 다름 아닌 미국의 19세기 여류 소설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루이자 메이 알코트이기 때문이다. <작은 아씨들>로 유명한 알코트는 지금까지 정숙하고 보수적인 여성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에 이런 설정은 생소한 것이 사실.
이에 대해 L M 어나니머스라는 익명의 작가는 “아마도 알코트는 처녀로 죽었을 것이다. 때문에 실제 인생에서 에로틱한 순간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그녀에게 섹스에 관한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주인공들의 내적인 욕망을 드러내면서 문학계의 G스폿을 건드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루이자 메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문학 작가들, 가령 멜빌, 에머슨, 소로, 호손 등의 성적 비밀을 밝히고 있다. 운 좋게도 이미 모두들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소당할 염려도 없다”며 넉살스럽게 말했다.
이런 ‘50가지 그림자’ 열풍은 출판업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책 속에서 주인공들이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시애틀과 포틀랜드의 호텔들 역시 때 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긴 마찬가지다. 발 빠르게 소설의 인기에 편승해서 ‘50가지 그림자’를 테마로 한 호텔 패키지 상품을 속속 내놓는 등 여성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 히스맨 호텔과 맥스 호텔. |
이에 대해 크리스 에릭슨 총지배인은 “저녁 식사 예약을 하거나 바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또한 친구들의 소개로 혹은 책을 읽은 후에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 찾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소설 마니아들을 위해 마련한 2750달러(약 310만 원) 상당의 ‘찰리 탱고 노리미츠’ 패키지는 그레이의 개인 헬리콥터 이름인 ‘찰리 탱고’에서 따온 것으로, 고객들은 그레이와 스틸이 그랬던 것처럼 헬리콥터를 타고 포틀랜드 상공을 비행할 수 있다. 이밖에도 여기에는 애피타이저와 음료, 저녁식사, 와인, 장미꽃, 리무진 서비스 등이 포함되어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