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헬기 저지 노인들의 ‘고지전’
▲ 지난 8월 30일 영남루에서 열린 밀양 주민들의 765kv 송전탑 건설공사 반대 촛불집회 현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 지난 8월 30일 영남루에서 열린 밀양 주민들의 765kv 송전탑 건설공사 반대 촛불집회 현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이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열혈 데모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최근에는 시위에 나선 여성 시의원에 대한 폭행논란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765kv 송전탑 건설공사’ 논란은 이제 ‘제2의 구럼비 사태’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요신문>은 거대 공기업 한국전력에 맞선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밀양 현장을 직접 찾았다.8월30일 경남 밀양 765kv 송전탑 공사 4공구 현장사무소 앞.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몇몇 마을 어르신들이 사무소 앞에 천막을 쳐 놓고 삼삼오오 앉아계셨다. 어르신들은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지난 8월 25일, 이곳에서 밀양시의회 소속 문정선 의원이 고지대 송전탑 건설현장으로 장비와 자재를 올려 보내려던 헬기를 몸으로 막다 인부들에게 폭행을 당한 일이 발생했다. 이 장면은 동영상으로 고스란히 찍혀 한 주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마을 주민 이남우 씨(70)는 “연약한 여성 몸 위에 건장한 인부 셋이 올라탔다. 한 놈은 문 의원의 목을 비틀고 음부 위에까지 앉았다. 이게 무슨 경우냐.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송전탑 건설이 확정된 2006년부터 마을 주민들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특히 송전탑이 통과하는 단장면, 산외면, 부북면, 상도면, 청도면 주민들은 본업인 농사까지 내팽개친 지 오래다.
공사가 본격화된 지난해부터는 마을 주민들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갖은 불상사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0일에는 산외면 공사현장에서 시위에 나선 약산사 비구니 법성스님이 인부로부터 성희롱과 폭행(성폭행 혐의 기각, 폭행 및 모욕에 대해서는 90만 원 벌금형 약식기소)을 당하며 논란의 불씨를 지핀 바 있다. 급기야 올해 1월 16일에는 시위에 나선 마을주민 이치우 씨가 공사반대를 외치며 스스로 분신하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최근 문 의원의 폭행논란까지 눈앞에서 지켜본 마을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 765kv 송전탑 건설공사 4공구 현장사무소.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 송전탑 96호기 공사현장에서 주민들이 공사 저지를 위해 천막을 치고 숙식을 해가며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송전탑이 들어서는 곳 대부분은 산 팔부능선 이상의 고지대다. 때문에 실질적인 공사현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1~2시간 산행이 필수다. 마을주민들은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고지대 현장에 직접 천막을 치고 현장인부들과 때 아닌 ‘고지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70~80대 어르신들도 노구를 이끌고 매일같이 산행길에 나서고 있다.
기자는 마을 주민의 안내를 받아 고지대 공사현장의 한 곳인 96호기 현장에 올라가봤다. 1시간 정도 가파른 산행을 해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대인 기자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도무지 노구의 어르신들이 올라가는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지난 7월에는 인근 95호기 현장에서 고지대 시위 여파로 60~70대 노인 3명이 실신해 헬기로 후송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96호기 현장에는 헬기로 날라 놓은 중장비들과 자재들이 널려 있었다. 기자가 현장에 도착하기 수 시간 전에도 이 곳에서는 공사 강행을 둘러싸고 인부들과 주민들 간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인부들은 현장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현장에는 마을주민들이 공사 저지를 위한 천막을 쳐 놓고 있었고 몇몇 어르신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동화마을 청년회장 손장규 씨(45)는 “우리는 1년 넘게 고지대에 천막을 쳐놓고 공사를 저지하고 있다. 주간 3교대, 야간 7교대로 돌아가며 24시간 철통경비중이다. 기습공사가 염려되기 때문에 우리는 비가 와도 이곳에 상주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인부들이 공사를 강행하려고 해서 죽기 살기로 막았다.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들어본 주민들의 절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손 씨는 “외부 사람들은 보상비를 더 받아내기 위해 혹은 혐오시설을 들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행위로 우리를 몰아세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박하다. 송전탑 건설은 농사와 관광이 주산업인 우리 마을에 그야말로 직격탄이다. 송전탑 건설이 확정된 이후 인근 땅들은 가치가 떨어져서 현재 금융권 담보 대출도 안 된다”라며 절박함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거 전에는 송전탑 결사반대를 외쳤던 여당 소속 현직 시장과 국회의원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또 선로라인에서 조계종 표출사 땅과 전직 시장의 친척 농장은 우회해 간다. 아무 힘없는 주민들의 마을로 지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권력 탓 아니겠는가”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기자는 그날 오후 고지대 공사현장에서 내려와 매주 수요일 저녁 밀양시내 영남루에서 열리는 촛불시위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매주 100명 남짓한 시민들이 모여서 각 지역별로 주간보고와 자율발언이 이어진다. 이날은 특히 여야 진상조사단 구성 실패와 문 의원의 폭행 건이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몇몇은 고성과 함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7년 넘게 끌어온 밀양 송전탑 건설 논란은 이제 정치권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 지난 8월 28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은 새누리당 측에 ‘밀양송전탑 진상조사단’ 구성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새누리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단독으로라도 조사단을 꾸린다는 계획이다.
이제 본격적인 정치권 개입이 시작된 밀양 송전탑 사태는 ‘제2의 구럼비 사태’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권을 앞두고 ‘밀양’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밀양=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가해자는 여 스님 폭행했던 그 남자”
기자는 4공구 현장사무소에서 인부들에게 폭행을 당한 밀양시의회 문정선 의원을 직접 만났다. 병실에서 만난 문 의원의 바지밑단을 올리자 시퍼런 멍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재 한전 측은 폭행 사실을 부인하며 문 의원의 ‘자작극’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날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난 민주통합당 유승희 의원은 “당 대책위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해 철저히 진상 조사를 할 것이다. 특히 가해자의 신원을 반드시 파악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문 의원과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당시 현장에서 사무소 측이 공사현장으로 헬기를 띄우려 하고 있었다. 고지대 공사현장에 장비와 자재를 올리고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하는 헬기였다. 이미 종전에도 수차례 헬기를 제지한 바 있다. 헬기가 떠서 현장으로 가면 결국 주민들이 지켜야 할 고지대 현장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가해자들을 기억하는가.
▲군복바지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인부 4~5명이 있었다. 그들이 미리 쳐 놓은 철조망을 피해 들어가는 순간 그들이 나를 깔고 앉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 중 한 명이 종전 법성스님을 폭행한 인물과 동일인이라는 것이었다.
―피해와 관련한 고소여부는.
▲밑에서 그를 봤다. 그는 비웃고 있었다. 그 순간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 정도로 모욕적이었다. 퇴원하면 반드시 고소장을 제출하겠다. 또 이 일을 떠나서 링거주사를 꽂고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현장에서 시위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많은 분들이 산 좋고 물 좋아 밀양을 찾는다. 우리 주민들 대부분 닭 한 마리 팔아서 1년을 버티시는 분들이다. 철탑 들어서면 결국 아무도 오지 않는다. 철탑 주변 고온 때문에 하우스 농사도 어려워진다. 실질적인 보상도 없다. 이러다 정말 밀양이 다 죽을 판이다. 반드시 정부 차원에서 원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에서 벗어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