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에 죽고사는 자리긴 한데…”
‘야왕’도 감독이란 타이틀 앞에선 힘 없는 존재였다. 지난 8월 28일 한화 구단은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한대화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대화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날 이미 구단 고위층으로부터 경질을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구단의 공식 발표와는 정반대되는 사실이었다. 구단이 먼저 감독에게 경질을 통보하고 언론을 의식해 자진사퇴로 포장해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는 것이 야구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감독 교체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프런트의 횡포는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구단 횡포의 피해자였던 프로야구 전임 감독들은 이번 한대화 감독 경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박종훈 전 LG 감독은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지휘봉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종훈 전 감독의 퇴임을 자진사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단이 박종훈 감독 영입 당시 5년 계약을 제시하며 오랜 시간을 주고 박종훈 체제의 리빌딩을 밀어주는 상황에서 불과 2년 만에 감독 본인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감독직을 내놓겠다고 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성적을 내지 못하는 신임 감독을 끌어내리기 위해 모기업 고위층의 압력이 있었다는 당시 소문을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다.
어렵게 통화가 닿은 박종훈 전 감독은 “평소에 TV를 통해 경기만 챙겨보는 편인데 오늘 한대화 감독의 자진사퇴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기사를 좀 봤다”며 같은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한대화 감독의 지금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했다.박 전 감독은 “구단이 감독에게 임기를 부여하는 것은 성적에 대한 기대치를 갖고 주는 것인데 감독이 감독직을 수행하다가 그 결과가 나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기를 권유받을 수 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납득을 해야 한다”며 감독과 구단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성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감독을 뒤에서 경질시키고 자진사퇴라고 발표하는 프런트의 언론플레이에 대해서 박 전 감독은 “감독이 직접 사임을 하건 구단에서 경질을 하건 중요한 것은 결과일 뿐이다”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감독 임기 중에 프런트가 감독을 얼마만큼 신뢰하고 최선의 지원을 해 주었는지가 더욱더 중요한 것 같다”고 박 전 감독은 주장했다. 올 시즌 중 한화 프런트가 한대화 감독이 지명한 수석코치를 아무런 동의 없이 교체하고 외국인 용병 수급에 난항을 겪는 등의 사건들이 과연 한대화 감독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최선의 지원을 해 주는 차원에서 발생한 일들이었는지 다시 한 번 곱씹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감독 세계가 프로 세계 내에서 가장 냉정한 것 같다고 말한 박 전 감독은 “한대화 감독도 전력이 약한 팀을 이끌어 성적을 올려 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며 한대화 감독에게 수고했다고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조범현 전 KIA 감독은 4년의 재임기간 동안 KIA를 두 차례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키는 등 비교적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그런데 2011년 시즌 KIA 마무리 훈련지로 구단이 보낸 경질 통보가 날아들었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룬 조범현 감독도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가 되었다. 1년 남은 감독 계약서는 그저 의미 없는 휴지 조각이 돼 버리는 순간이었다.조 전 감독은 현재 KBO 육성위원장 겸 초중고야구팀 창단위원회 위원으로 전국 방방곡곡의 야구장을 찾아가 아마추어 야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대화 감독 경질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다는 조범현 위원장은 경질 건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올스타브레이크 때도 올 시즌까지는 한대화 감독으로 간다고 약속했다가 정규 시즌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경질시켰다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조 위원장은 덧붙여서 “감독을 선임하고 경질하는 데 있어서 그룹의 특정 문화나 색깔도 작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적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라며 프로팀 감독은 성적으로 평가받는 자리라는 생각을 내비쳤다.
과거 넥센의 전신 현대를 열한 시즌 동안 이끌며 4번의 우승을 이끈 김재박 전 감독은 2009년 LG 감독을 마지막으로 야인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KBO 경기위원회 소속 경기감독관을 맡고 있는 김 감독관은 “감독직을 그만둔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야구장에서 일하고 있다”며 웃었다.한대화 감독 경질 사태를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고 운을 뗀 김 감독관은 “현장을 밖에서 지켜보는 구단이나 모기업 관계자들은 자기 편한 대로 얘기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안 좋은 얘기가 나오는 부분이 안타깝다. 그러나 성적이 나쁘면 경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팀 성적이 하위권에 머물렀다면 감독 자리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감독이라는 위치가 어려운 자리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하는 김 감독관은 “야구라는 것이 감독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구단, 감독, 선수 모두가 조화를 이뤄야 성적도 낼 수 있고 서로간의 관계도 좋아지지 않겠는가”라며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고충을 대변했다.
감독 제의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 감독관은 “이제는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가 있었던 자리가 감독의 자리이기 때문에 제의가 온다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라며 욕심을 내비쳤다.
차인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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