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이름으로 자신들 이익 챙기는 현실 질타
진보정치는 위기에 처해있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진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책 ‘다시 진보의 길을 묻다’(나무와숲)가 상재됐다.
저자 윤영상은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투옥됐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제적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석방 후 인천과 경기 지역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노동계급(LC)’ 그룹과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생활을 겪기도 했다. 그는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과 민중당 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백기완후보선거대책본부 선거공약 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정책국장과 대외협력국장을 지냈다. 1996년엔 장을병 의원 비서관으로 국회에 몸담기도 했다. 2001년 이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뒤엔 진보신당 정책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카이스트(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연구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진보정치 위기와 재구성에 관한 고민을 정리한 윤영상은 “진보정치 위기는 언제부터였을까”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진보정치 위기는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보적 가치와 정체성 혼란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민주당-정의당, 반성과 혁신 없이 미래를 낙관했다”
저자는 “진보진영이 연대와 협력을 통해 현재의 한국 정치를 바꾸지 않는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문제의식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싹텄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 생각이 발전하는 데는 고 노회찬 의원과의 치열한 토론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덧붙인다.
윤영상은 “현재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것이 정말 정치발전의 표식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에겐 합리적 토론보다 흑색선전, 가짜뉴스, 군중심리와 포퓰리즘의 극한대결을 뜻하는 용어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하고 혐오하는 극단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진보정치와 보수정치 간의 합리적 경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이 합리적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사회적 환경과 깨어 있는 시민들 힘이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또한 낡고 잘못된 구조를 바꿔야 할 진보가 기존 질서의 일부가 돼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 이익을 챙기고 있는 현실을 질타한다. 그러면서 기득권을 내려놓고 시대 상황에 맞는 진보적 가치를 정립하고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진보이며 미래의 진보”라고 말한다.
특히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 전쟁과 평화는 진보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시대적 과제로 그런 과제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진보의 이름으로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보수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진보와 개혁보수가 동반성장하지 않는다면 둘 다 기성 정치문법 속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저자는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민주당과 정의당은 반성과 혁신 없이 미래를 낙관했다”며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미래를 위한 치밀하고 체계적인 준비는 ‘생색내기’에 그치고 적폐청산은 양당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해 결국 문재인 정부 실패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또한 “보수가 총결집해 상상을 초월한 공격을 해댄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문재인 정부의 무능력, 진보정치 세력의 무능력과 한계로 인해 문재인 정부도, 정의당도, 조국도 무너졌다”며 “당시 조국 수호보다 검찰개혁을 내세우자는 주장과 조국 사태를 역이용해서 한국 교육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략적으로 검토할 만한 주장이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현재 남북 관계와 국제정치, 국내와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2027년 대선에선 보수세력에 유리한 지형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며 “민주당과 민주당 후보가 윤석열 정부나 보수적 후보들보다 더 강렬한 평화지향과 남북관계 개선, 노동과 일자리, 경제성장과 복지정책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문한다.
‘다시 진보의 길을 묻다’는 △진보, 보수 개념과 역사적 맥락을 다룬 ‘진보와 보수’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부터 촛불혁명 이후까지 우리나라 진보정치 궤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한국 진보정치의 역사와 현실’ △지난 대선을 분석한 ‘다시 보는 2022년 대선 결과’ △민주당과 정의당 위기를 조명한 ‘진보정치의 위기와 혁신 논란’ △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 재난, 전쟁 등 지구적 위기와 시대적 과제를 다룬 ‘시대적 과제와 진보정치’ △진보정치 나아갈 길을 모색한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저서는 다시 진보의 길을 자문자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