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56>
▲ 나전칠외다리소반.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
소반은 식기를 받치는 크기가 작은 상이다. 생활 속에서 늘 우리 민족과 함께했다. 온돌방에 앉아서 생활하는 문화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부엌과 방이 멀어서 음식을 나르는 상이 필요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와 장유(長幼)의 구별이 분명했기에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쓰였다. 이밖에 소반은 주안반(酒案盤, 술 안주상)·대궐반(大闕盤, 대궐잔치상)·돌상(百玩盤, 돌날 돌잡이에게 차려주는 상)·약반(藥盤, 약사발을 올려놓는 상)·춘반(春盤, 입춘에 궁중과 민간에서 차리는 음식상)·과반(果盤, 과일상) 등으로 쓰였다.
이처럼 우리 곁에서 동고동락한 소반에 대해 시인 이상범은 시집 <꿈꾸는 별자리>(2001)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늘 봐도 비실비실 지레 지쳐 굳은 상판 / 대접도 변변히 받지 못한 툇마루 끝 / 지금은 땟물 나는 거실 마른 꽃의 꽃받이로. / 이름을 다시 달자면 그야 꽃사슴 다리 / 고봉밥, 술 한 대접, 풋나물, 자반 한 토막 / 그런 것 고작인 날에 개다린들 황송했지. / 때 끼고 윤기 돌고 흠이 간 작은 소반 / 가다간 혈이 닿아 눈물 찔끔 한도 찔끔 / 발그레 일그러진 면상 먼 얼굴이 겹친다. /
소반의 역사는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5~6세기경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여자들이 소반에 음식을 담아 옮기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은 남아있지 않다.
소반의 종류는 60여 종에 이른다. 지역마다 그 지역에서 나는 나무와 생활양식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다. 가장 유명한 것이 통영반(統營盤)·나주반(羅州盤)·해주반(海州盤)이다.
경상도 통영반은 상의 바깥언저리를 꽃잎 모양으로 조각했다. 초엽(草葉)이라는 난간(欄干)이 사각(四脚)을 기둥으로 끼고 있어 반에 힘을 받치고 있는데 통영반은 이 초엽조각장식으로 유명하다. 참대마디, 국화, 넝쿨, 구름 등을 조각해 넣었다. 통영반은 튼튼하면서도 제작이 편리하고 실용적이다.
▲ 나주반. 사진제공=나주소반 |
해주반은 투각무늬가 있는 판다리를 붙인 네모난 소반이다. 간단한 것은 다리 밑 전을 삼각형, 사각형, 복숭아 모양으로 깎아내고 좀 복잡한 것은 아(亞), 수(壽), 복(福) 등 글자무늬를 도려냈으며 가장 복잡한 것은 연꽃, 매화, 국화 등 꽃무늬를 뚫어 새겼다.
소반은 꾸임이나 거짓이 없는 수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1929년 우리의 소반 문화에 대해 논문을 쓴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은 세월이 흐르면서 윤기를 더해 사용자가 소반 미학의 완성자인 점이 특색”이라고 적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멋과 아름다움이 점점 더 깊어진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일까? 소반은 1961년 한국의 대표적인 공예품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만국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당시 박람회의 주최 참가국은 34개국, 출품국은 72개국이었다. 전체 40만㎡ 가운데 한국관이 얻은 공간은 고작 10여 평 정도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박람회 출품이었다. 지금이야 첨단 전자기기나 신형 자동차, 소프트웨어 등을 출품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이때 소반과 함께 출품된 물건은 의장(衣欌) 문갑(文匣) 탁자(卓子) 화병(花甁) 수병풍(繡屛風) 상자(箱子) 죽렴(竹簾) 등 26종이었다.
하지만 소반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근대화와 함께 생활양식이 달라졌고, 서구의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천덕꾸러기처럼 여겼던 우리의 정신 때문이다. 서구의 물건과 문화는 지고지순한 선(善)인가? 새로운 것은 늘 좋은 것인가? 주인과 함께 세월을 보낼수록 윤기를 더해가는, 그래서 그 주인을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사람으로 섬기는, 소반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