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투자 지연·취소나 가격 낮춰 팔아…출고가 낮춘 중소형 전기차로 전략 수정도
전기차 성장률 둔화는 올해 초부터 예견됐다. 고금리 기조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됐고, 각국 정부들이 보조금 축소에 나섰기 때문이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영국은 지난해 6월부터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했다. 2025년부터는 세제 혜택도 폐지한다. 스웨덴도 지난해 11월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했다. 프랑스는 올해 전기차 보조금 상한액을 5000유로(약 712만 원)로 삭감했다. 중국은 2023년부터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했다.
독일은 올해 전기차 보조금 상한선을 4500유로(640만 원)로 삭감했다. 독일은 내년까지 단계적 삭감 후 보조금 폐지를 계획했으나, 독일 헌법재판소가 코로나19 대책용 예산 중 사용되지 않은 600억 유로(약 85조 6530억 원)를 정부가 기후변화대책기금으로 바꾼 게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 내년부터 전기차 보조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보조금 삭감·폐지로 전기차는 대부분 출고가와 맞먹는 가격에 판매됐다. 그러자 전기차 시장에서의 우선 요소가 주행 거리 등 성능이 아닌 ‘가격’이 됐다. 올해 중국산 전기차들이 유럽에서 인도량을 높이며 선전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미국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도 올해 최대 20% 가격을 인하하는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산 이차전지를 탑재한 테슬라 모델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모델 Y 가격은 5699만 원으로 정부 보조금 등을 적용하면 4000만 원대 후반까지 떨어진다. 기존 미국산 모델Y 롱레인지보다 약 3000만 원 저렴했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테슬라는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132만 대를 인도했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5.7% 증가한 수치로 시장 평균(36.4%)보다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그러나 테슬라는 실적 측면에서 웃지 못했다. 테슬라의 3분기 영업 이익은 17억 6400만 달러(약 2조 4000억 원)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 감소한 수치다. 지난해 17%가 넘던 영업이익률은 7.6%로 급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3분기 실적 발표 자리에서 “고금리 환경이 걱정된다. 이런 환경에선 사람들이 자동차를 구매하는 게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 일론 머스크 CEO는 이날 멕시코 공장 건설 계획 연기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글로벌 완성차 제조업체들은 테슬라와 달리 전기차 판매 마진율이 높지 않다. 업계에 따르면 가격 인하를 펼치기 전 테슬라는 미국 시장에서 1대당 평균 9574달러(약 1248만 원)를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2위인 미국 전기차 제조업체 GM(제너럴모터스, 2150달러)과는 4배 차이이며 6위 현대차(927달러)와는 약 10배 차이다. 심지어 미국 완성차 제조업체 포드는 3분기 실적발표에서 전기차 사업부인 ‘e-포드’가 약 13억 달러(약 1조 7000억 원)의 손실을 봤다고 밝혔다. 브랜드 전동화 전략에 따라 수요 확보에 집중한 게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가격 인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글로벌 완성차 제조업체들은 전기차 투자 연기·취소로 목표를 수정했다. 독일 완성차 제조업체 폭스바겐그룹은 올해 3월 배터리 생산과 북미 사업을 포함한 분야에 1800억 유로(약 253조 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6개월 만인 지난 9월 전동화 전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목표 수정을 암시했다. 결국 지난 11월에는 동유럽에 세우기로 한 4번째 배터리 생산 공장 설립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또 2026년까지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세우기로 한 전기차 전용 공장 설립 계획도 전면 백지화했다.
포드는 약 120억 달러(약 15조 5000억 원)의 전기차 설비 확충을 미루기로 했다. 이에 따라 포드는 LG에너지솔루션과 지난 2월 체결한 튀르키예 배터리 합작법인 설립 3자 MOU를 철회했다. SK온과 합작해 미국 켄터키주에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 가동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 가동 목표는 2026년이었다. 다만 SK온은 해당 공장 건설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일축했다.
포드는 연간 전기차 60만 대 생산 목표 시점도 올해 말에서 1년 늦췄다.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되는 전기차 머스탱 마하E 생산도 늦추고 있다.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 생산 목표도 2024년 1월부터 당초보다 절반 이상 줄이기로 했다. 존 로러 포드 최고재무책임자(CFO)는 3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엄청난 가격 하락에 따라 새로운 전기차 및 배터리 생산능력에 대한 투자계획 중 일부를 연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 10월 미시간주에 세우기로 했던 전기 픽업트럭 공장 가동 시점을 1년 연기했다. 예상 가동 시점은 2025년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합작으로 미국 테네시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 제조 공장도 가동 시기가 2024년 초로 연기됐다. 일본 완성차 제조업체 혼다와 추진하던 약 50억 달러(약 6조 5000억 원) 규모의 전기차 공동 개발 계획도 철회했다. 단기 목표로 세웠던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북미에서 전기차 40만 대 생산 계획도 폐기했다.
전기차 투자 시기는 일시적으로 미뤄졌으나, 다가오는 2024년에도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각국 정부들의 ‘자국 우선주의’ 전기차 보급 정책으로 특정 국가에서 보조금을 못 받는 업체도 등장할 예정이다. 특정 국가에서 세제 혜택을 받지 못해 가격 경쟁에서 뒤처진 제조업체들의 점유율 쟁탈을 위한 경쟁이 심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가령 프랑스는 내년 7월부터 환경 점수를 충족한 차량만 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환경 점수 감점 요인에는 ‘선박 수출’이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체코에서 생산 중인 현대차 ‘코나’는 보조금 지급 대상에 포함됐으나, 전기차 ‘니로’와 ‘쏘울’은 한국에서 생산해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테슬라도 독일에서 생산 중인 모델 Y는 포함됐으나, 중국에서 생산되는 모델3는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중국 전기차 제조업체 상하이 자동차(SAIC) 산하 브랜드는 모두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도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중국 등 해외우려기관(FEOC·Foreign Entity of Concern)의 투자 비율을 일정률 이하로 낮춘 전기차 제조업체에만 최대 7500달러(약 973만 원)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배터리 부품은 내년 1월부터, 양극재·음극재 등 핵심 광물 제조업체는 2025년 1월부터 적용된다.
한국무역협회는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 소재 조달 시 파트너의 IRA상 FEOC 리스크를 검토하고, 중국 기업과 합작투자(JV) 진행 시에도 FEOC 여부 판단 및 지분율 조정에 따른 추가 비용 발생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중국 배터리 기업이 IRA상 FEOC라고 볼 수 없으나, 지분율·이사회 구성 등 파트너 중국 기업의 정부 관여 정도를 검토하여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완성차 제조업체들은 국가의 보조금 정책에 따라 전기차 가격에 받는 타격을 줄이기 위해 중저가형 전기차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GM은 2025년 쉐보레 간판 전기차 ‘볼트 EV’를 전격 복귀시킨다. 볼트 EV는 2022년 초 2세대를 출시했으나 수익성이 높은 다른 전기차를 생산하기로 하면서 올해 연말부터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 가격 경쟁 바람이 불면서 GM은 당초 계획을 철회했다. 차세대 볼트 EV는 가격 경쟁력을 위해 이차전지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사용할 예정이다.
폭스바겐도 2025년 2만 5000달러대(약 4000만 원)의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ID.2를 출시할 예정이다. 스웨덴 완성차 제조업체인 볼보도 내년 상반기 소형 전기 SUV ‘EX30’를 우리나라에 출시할 예정이다. 가격은 전기차 보조금을 100% 받을 수 있도록 4945만 원(코어 트림)부터 책정했다.
현대차는 경차 캐스퍼를 전기차 모델로 출시할 예정이다. 업계에 따르면 캐스퍼 위탁생산 업체 광주글로벌모터스(GGM)는 전기차 생산 설비 공사를 진행했고 내년 7월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기아는 내년 2분기 EV3, 연말에는 EV4 출시를 목표로 삼고 있다. EV3는 소형 전기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 EV4는 중형급 세단 전기차다. EV3·4·5의 가격은 3만 5000~5만 달러(약 4700만~6700만 원) 사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보조금 적용 시 EV3는 3000만 원대에 구매가 가능하다.
임현진 한국자동차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전기차 초기 시판 당시에 비해 현재 전기차 보급 단계에서는 가격이 비자 구매 결정 및 전기차 보급 확산에 더욱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며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 확보를 통해 전기차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동시에, 수년 내에 현실화할 주요국의 전기차 구매 보조금 폐지·삭감 계획에 계속해서 대응하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