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연동형 유지 시 제3지대 신당 반사이익 가능성…실적 절실 거대 양당 ‘기존 제도 리턴’ 물밑 공감
한 전직 의원은 “선거 유불리를 따지는 데엔 바람과 구도가 영향을 미치는데, 이보다 선행되는 요소가 있다”면서 “바로 룰”이라고 했다. 그는 “룰에 따라 바람과 구도의 세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2024년 제22대 총선이 100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선거제 방식은 정해지지 않았다. 비례대표 선거제도가 어떻게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 총선 결과는 달라질 전망이다.
제21대 총선에서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정당이 비례대표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만큼 지역구 의석 비율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그 격차를 메워주는 제도다. 한 정치권 인사는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지역구 선거 특성상 정의당을 비롯한 소수 원내정당, 그리고 최근 창당 움직임을 보이는 신당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제도”라고 했다.
하지만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효과가 미미했다는 지적이 높다. 여권 관계자는 “국민들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납득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비례정당이 의석을 가져간 뒤 도로 거대 양당으로 흡수돼 양당 정치가 고착화하는 부작용이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거대 양당 간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겠다는 확실한 합의와 이행이 되지 않는 한 판타지에 가까운 이상만 표방하는 제도로 판명 난 셈”이라고 했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정의당이 패스트트랙을 통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과시켰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반대했던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합의 없이 선거 제도가 바뀐 상황을 ‘비례 위성정당’ 창당으로 맞받아쳤다. 미래한국당을 창당했다. 그러자 민주 진영에서도 비례연합정당 더불어시민당과 비례정당 열린민주당 등이 창당 러시를 이어갔다. 정치권 곳곳에서 조삼모사라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선거와 완전히 독립된 선거로 치러지는 방식이다. 비례대표 선거 득표율이 비례대표 의석으로 이어진다. 가장 직관적인 방식이라는 평가다. 최근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 쪽으로 마음이 기운 양상이다. 국민의힘은 처음부터 병립형 비례대표제 존치를 원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넘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민주당 내부에서도 변화 기류가 감지된다.
방아쇠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당겼다. 지난해 11월 28일 이 대표는 자신의 유튜브 방송을 통해 선거제 개편 이슈를 언급했다. 이 대표는 “이상적인 주장으로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현실 엄혹함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실시간 방송 중 댓글과 소통하며 “선거는 승부”라면서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는) 신중하게 논의하겠다. 어쨌든 선거는 결과로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내부에서 꿈틀대던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 기류에 이 대표가 응답하자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다. 이탄희 민주당 의원은 불출마 선언을 하며 병립형 회귀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 의원은 12월 13일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국회와 거대 양당은 선거제 퇴행 논의, 양당 카르텔법 논의를 중단하라”면서 “선거법 퇴행 시도를 포기하고 위성정당금지법 제정에 협조하라”고 호소했다.
이 의원은 “멋없게 이기면 총선을 이겨도 세상을 못 바꾸고 대선이 어려워진다”면서 “선거제 퇴행을 위해 여야가 야합하는 무리수를 둔다면 총선 구도가 흔들리고, 본판인 253개 지역구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의원 발언과 관련해 정치 일선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반박이 제기되는 기류가 형성됐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여야 합의도 없이 선거제를 막 바꿔놓았고, 그 제도의 약점이 ‘위성정당’ 출현으로 부각되지 않았느냐”면서 “비교적 논쟁이 적은 기존 제도로의 회귀를 왜 선거제 퇴행이라고 표현하는지 이해되질 않는다”고 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 여야가 비례 위성정당 창당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지 않으면, 선거제를 유지한다 한들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대표 말처럼 선거는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23년 연말부터 국내 정치권엔 구도를 바꿀 만한 큰 이슈들이 연이어 터졌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2023년 12월 27일 서울시 노원구 소재 한 음식점에서 탈당 선언 및 신당 창당 청사진을 제시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고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이 띄웠던 ‘불판론’을 이 전 대표가 벤치마킹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불판론’은 정치권 불판을 갈아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였다.
12월 30일엔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회동했다. 분열과 통합 사이 마지막 갈림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회동은 사실상 결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 대표는 회동 이후 창당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비명계 현역의원 모임인 ‘원칙과 상식’을 비롯한 일부 민주당 비명계 현역 의원들 사이에서도 거취를 두고 계산이 복잡해졌다.
앞서 언급한 정치권 인사는 “다음 총선이 4자구도로 개편되는 양상”이라면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에서 각각 비주류 분파 정당이 하나씩 신설될 것”이라고 바라봤다. 이 관계자는 “4자구도에서 국민의힘은 이준석 신당으로 지지층이 이탈하는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민주당은 이낙연 신당으로 지지층 이탈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야 한다”면서 “지역구가 기존 거대 양당에 유리하다고 하면, 비례대표 선거에서 신당들이 어느 정도 약진하는지가 승부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오랜만에 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를 위해 거대 양당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가 일각에선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전국단위인 비례대표제 선거를 여러 개 권역을 쪼개서 시행하자는 것이다. 한 소수정당 관계자는 “지역별로 권역을 쪼개면 소수정당 진입장벽은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개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비례대표 선거제도 키는 이재명 대표가 쥐고 있다. 지금 현재 상황으로는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회귀할 가능성이 99%에 육박하지 않았나 그렇게 보고 있다”면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수가 병립형밖에 남지 않았다. 준연동형을 존치한다면, 이낙연 신당과 이준석 신당이 반사이익을 보고 거대 양당이 불이익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공감대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 교수는 “준연동형이 존치된다면, 국민의힘은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며 선거제도 불합리를 강조하려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준연동형을 처음 추진했던 민주당은 또 위성정당을 만들어야 할지 여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여러 복합적 상황을 따져봤을 때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가 유력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