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 아니라 내가 ‘적자’요
▲ 지난 24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이희호 여사의 생일 축하 인사를 위해 김대중 도서관을 찾았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선대위 인선만이 아니다. 문 후보는 24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DJ)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해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남북관계는 조금 대담하게 생각하려 한다”며 “(대통령에) 당선되면 곧바로 당선자 때 북한에 특사를 보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하겠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5일에도 문 후보는 경기 파주의 도라산역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선대위 정책캠프인 ‘미래캠프’의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위원들이 다수 동행했다. 이 여사 예방과 도라산역 방문 모두 문 후보가 DJ의 햇볕정책 계승자임을 내외에 과시하는 상징성이 있다.
호남을 향한 문 후보 구애의 최종판은 27일 광주·전남 방문이었다. 문 후보는 이날 전남의 태풍 피해지역을 둘러보고 1박을 한 뒤 28일 오전 광주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에 참배하고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문 후보는 자신이 ‘광주 정신’과 DJ의 유지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당 후보임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나로 통합해 승리하라”는 DJ의 유지에 따라 야권통합을 이뤄 민주당을 창당했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됐으니 이제는 자신에게 모든 힘을 모아달라는 메시지를 설파했다.
문 후보의 최근 행보에 대해 그의 주변 인사들이나 당 지도부도 ‘노골적인 호남 구애’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상호 선대위 공보단장은 선대위 대변인 및 본부장 인선 과정에서 호남에 대한 배려가 있었음을 분명히 했다. 우 단장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온 호남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보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를 선호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노(친노무현) 진영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아직까지 감정적으로 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여사 예방, 도라산역 방문 등 최근 문 후보의 호남 끌어안기 행보를 거론하면서 “한번에 정리되지는 않겠지만 문 후보가 지속적으로 화해의 메시지를 던지고 진정성을 보인다면, 저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호남이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지금의 이 행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후보가 이처럼 특정 지역에 목을 맨 것 같은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호남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인구수로 보나 유권자수로 보나 호남의 비중은 10% 남짓한 수준이지만, 정치적 영향력만큼은 30∼40%는 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호남의 결정이 수도권의 호남 출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수도권의 민심 변화가 다시 호남의 여론을 강화하는 순환구조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호남의 정치적 위상이 이처럼 막강함에도 최근 호남에서 나타나는 이상기류는 문 후보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문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에도 이 지역 여론조사에서는 줄곧 안철수 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갤럽의 9월 셋째주(17∼21일) 조사 결과에서도 이 같은 추세는 확인된다. 다자대결 조사 결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39%, 안 후보가 28%, 문 후보가 22%의 지지율을 보였는데, 호남지역만 놓고 보면 박 후보 10%, 안 후보 44%, 문 후보 30%로 나왔다. 문 후보와 안 후보 중 누가 야권 단일후보로 적합한지를 물은 결과에서는 호남의 문 후보 비토 기류가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전국적으로는 문 후보가 47%의 지지를 얻어 안 후보(38%)를 앞섰지만 호남에서는 37% 대 50%로 오히려 안 후보에게 밀린 것이다.
이에 대해 전남 출신의 한 민주당 당직자는 최근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호남의 바닥 민심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 ‘안철수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어째서 그걸 묻느냐고 했더니 고향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서 안 후보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지켜봤다고 하더라. 말 그대로 호남 지역의 바닥에서 문 후보를 대체할 사람을 물색하는 것 같아 난감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 밀리고 있는 문 후보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그를 호남으로 향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번 대선의 후보등록은 11월 25∼26일로 예정돼 있다. 이 때문에 야권에선 문 후보와 안 후보 간의 야권후보 단일화가 아무리 늦어도 11월 20일까지는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를 위해 10월 말부터는 구체적인 협상이 시작돼야 한다는 점에서 두 후보 간의 각개약진식 경쟁이 가능한 시간은 한 달 남짓한 셈이다. 이 때문에 문 후보와 안 후보 주변에서는 공통적으로 “추석 연휴를 거치면서 형성되는 민심이 야권후보 단일화 승자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조정기에 빠져 있던 여론이 추석 연휴를 거치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굳어질 경우 이를 변화시키는 것은 훨씬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문 후보로선 호남의 마음을 잡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단순한 구애만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역사적으로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영남의 ‘우리가 남이가’ 정서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문 후보 자신이 시대정신을 받아 안고 실현할 적임자라고 입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단지 친근감을 표하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호남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인사는 “호남의 여론 주도층은 민주당을 사랑하지만 민주당의 현 상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며 “민주당을 변화와 쇄신으로 이끌고, 이를 통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문 후보가 아무리 호남에 공을 들여도 호남의 마음을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