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2차전지·자동차 등 동반부진, 기대치 꺾여…혁신과 비전 없는 공장형 제조업 한계 지적도
간판기업들의 부진이 심각하다. 기대요인보다 걱정거리가 많아 전망도 어둡다. 외국인 자금은 물론 연기금이나 개인 자금도 한국은 외면하고 미국이나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일시적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가총액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3%, 89%가량 반등했다. 올해 실적이 개선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와 이어지는 지난해 4분기 실적이 시장 기대치를 크게 밑돌았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매출 세계 1위를 인텔에 내줬고 휴대폰 판매 1위(대수 기준)도 애플에 빼앗겼다.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AI)에 꼭 필요한 메모리반도체(HBM)를 유일하게 생산하지만 인텔의 중국 반도체 공장 인수 부담이 여전하다. 양사의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판매는 회복세지만 여전히 가격이 낮은 수준이고 재고량도 상당하다.
차세대 먹거리로 주목받던 전기차와 2차전지도 부진의 늪에 빠졌다. 최근 7개월 사이 2차전지 간판인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에코프로비엠이 모두 반토막이 났다. 포스코홀딩스, LG화학, 포스코퓨처엠 등 2차전지 소재주들 역시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전기차 수요 증가세는 둔화되는데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면서다. 중국은 심각한 생산 과잉의 늪에 빠졌고 테슬라도 연 평균 50% 성장 목표를 크게 하회하기 시작했다. 전기차 생산원가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배터리에 대한 완성차업체의 가격인하 압력이 커진다는 뜻이다.
자동차 3대장주인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도 지난해 큰 폭의 반등에 성공했지만 새해 들어 이를 대부분 반납했다. 지난해 양호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올해 전망은 어둡기 때문이다. 유럽과 중국이 모두 경기침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자동차 수요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미국의 경기가 좋다지만 내구재보다 소비재로 수요가 쏠리는 모습이다. 후티 반군이 홍해에서 도발하고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으로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가 막히면서 글로벌 물류망이 치명적 위험에 노출됐다. 완성차 수출은 물론 현지생산에까지 차질을 빚고 있다.
AI를 활용한 신약개발 가능성에 미국과 유럽의 바이오 관련주에 대한 기대는 높지만 국내 간판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의 주가 움직임은 미지근하다. 생산이 주력이어서 신약개발 기대 수혜 순위에서 뒤로 밀리기 때문이다. 네이버와 카카오도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는 AI 부문에서 이렇다 할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특수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모습이다.
이 밖에 정부의 대출규제 강화에 안정적 이자이익을 자랑하던 KB금융, 신한지주 등 금융주도 지지부진이다. 여기에 한때 시가총액 20조 원을 넘었던 LG전자, SK, SK이노베이션, 크래프톤, 하이브 등 가전, 정유, 게임, 엔터테인먼트 대장주도 10조 원대에 갇혀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원자재 비용 상승과 금리 부담 등이 제조업 경기에 악영향을 미쳤고 중국 경제 부진이 교역 관계가 밀접한 독일 및 한국으로 전이되고 있다”면서 “미국과 중국의 공급망 갈등 증폭 그리고 중동 등 각종 지정학적 리스크 장기화는 글로벌 교역 사이클 둔화를 유발시키면서 제조업 경기 부진을 오랜 기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연구원은 이어 “상품 소비가 내구재 중심에서 서비스, 특히 디지털 서비스로 전환되는 점도 제조업에는 위협”이라며 “미국 증시에서 매그니피센트7(애플, 아마존닷컴,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플랫폼, 테슬라, 엔비디아) 기업 중 제조업 기반은 테슬라와 애플뿐이며 심지어 이들 역시 데이터 등 디지털 서비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공장형 제조업에 치우친 우리 경제와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혁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로 국내 주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비전 부재를 꼽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지난 1월 24일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 제23회 ‘런앤그로우(Learn&Grow) 포럼’ 강연에서 "미국의 주요 테크 기업은 리더가 어떤 변화와 세상을 꿈꾸는지 비전과 마일스톤(이정표)을 제시하지만, 한국은 그 어떤 테크 기업도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며 "비전 자체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