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진 ‘박’위로 덮치는 측근비리
▲ 이종현 기자 |
지난 10월 4일 비공개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발언자로 나선 의원들은 작심한 듯 친박 실세들이 현 위기의 원인이라며 성토했고, 참석자 중에서는 박 후보의 선거 전략을 문제 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초 주제였던 경제민주화는 뒷전으로 밀렸고 친박 2선 후퇴론, 새판 짜기론 등이 봇물을 이뤘다.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자 친박계 중진인 유승민 의원은 박 후보를 제외한 당 지도부와 선대위원, 당직자 등의 총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여했던 한 친박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추석에 지역구를 다녀 온 의원들 중 대부분이 민심 이반 현상에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박 후보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측근들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고 전했다.
정치권에선 이날 의원총회에서의 강경 발언은 최근 박 후보가 야권 후보들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위기감이 투영돼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 후보가 지지율을 좀처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철수-문재인’ 단일화까지 성사될 경우 대선에서 필패할 것이란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새누리당 내부의 헤게모니 다툼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비상대책위원회 출범, 4월 총선, 대선 캠프 구성 과정에서 박 후보 주변에서 밀려난 세력들의 ‘반격’이라는 것이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의원총회 사태의 핵심은 측근 전횡에 대한 비주류들의 폭발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박 후보 대선 캠프를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꾸려 입지 강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원총회 당시 단상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친박 실세들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우선 포문을 열었던 유승민 의원은 한때 핵심 중에 핵심으로 통했지만 지금은 친박계 비주류로 분류되고 있다. 의원총회가 끝난 후 “박근혜 대세론은 끝났다. 새누리당은 대안이 없다”고 비판했던 남경필 의원 역시 소장파 대표격인데도 박 후보 대권 행보에서 소외돼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밖에 발언을 신청한 대부분의 의원들이 비박 진영이었고, 간혹 친박계가 나오긴 했지만 그 수위는 그다지 높지 않아 확연한 온도차가 감지됐다. 의원총회 후 친박 비주류, 소장파, 비박 의원들 사이에선 “속 시원하다” “눈과 귀가 가려져 있는 박 후보가 경청해 주길 바란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 유승민 의원이 4일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박근혜 대선후보를 제외한 당지도부와 선대위원, 당직자 등의 총사퇴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
이처럼 친박계가 공식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소 격앙돼 있는 분위기다. 친박 비주류, 소장파 등이 겉으로는 대권 승리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박 후보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는 자신들을 내치기 위한 노림수가 담겨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비박계 의원이 의원총회 직후 ‘비보도’를 전제로 “최경환·서병수 등 친박 신주류와 전횡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박 후보 일부 보좌진들이 물러나야 이번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박 후보의 한 측근은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최 실장과 가까운 한 친박계 인사는 “그동안 박 후보를 위해 헌신해왔는데 도대체 누구보고 나가란 말이냐. 2선 후퇴 운운하는 그들은 지금까지 뭐했느냐. 박 후보에게 위기가 닥치면 그들이 과연 몸을 던져 막을지 의문”이라면서 “선거를 치르다보면 지지율이 빠질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핑계로 자리싸움을 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후보 역시 전면 쇄신 요구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며 측근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박 후보는 10월 4일 부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당에서는 항상 다양한 의견이 있지 않으냐. 내일모레가 선거이기 때문에 힘을 모아 잘 치러야 할 때 아닌가”라며 현 체제를 고수할 것임을 피력했다. 박 후보 캠프 관계자는 “박 후보 역시 이번 의원총회에서의 발언들에 대해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이번에 공격을 받은 최경환 실장 등에 대한 박 후보의 신뢰는 여전하다. 박 후보를 10년 이상 따라다닌 보좌진들 역시 마찬가지다. 박 후보가 믿을 만한 측근들을 쉽게 내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결국 박 후보의 용인술로 귀결되는 문제다. 이번 의원총회에서 나온 발언 중 분명히 귀담아들을 부분이 있다. 박 후보가 포용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번 기회에 탕평책을 쓸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박 후보의 입장 표명 후 들끓었던 새누리당 분위기는 다소 수그러든 모습이다. 그러나 유승민 의원을 필두로 한 친박 비주류와 비박 진영, 소장파 등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다시 공세의 고삐를 죌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박 후보의 ‘한마디’로 정리되기엔 사태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최 실장이 전격적으로 비서실장 사의를 밝힌 것도 이러한 당내 기류를 포착하고 박 후보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권영세 종합상황실장은 “한 사람(최경환 실장)한테 책임을 귀속시킬 수 없지만 그동안 당 조직들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상황을 쇄신하는 차원에서 이해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치권에선 친박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검찰 수사의 파장이 새누리당 인적쇄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복수의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재 일선지검에서 진행 중인 정치인 관련 수사 가운데 어느 정도 혐의가 드러난 친박 의원은 세 명 정도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박 후보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 중 두 명은 정치자금법을, 나머지 한 명은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친박 핵심인 A 의원의 경우 공천 당시 몇몇 후보자들로부터 헌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여서 그 진위 여부에 따라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 검찰의 한 관계자는 “A 의원은 공천과정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후보자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진술이 나왔다. 그 후보자는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수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혐의에 대해 이미 물증까지 나온 상태다. 대선 기간과는 별개로 소환 여부 등을 통보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정치권에선 이들에 대한 검찰 수사 소식이 알려질 경우 박 후보도 치명타를 입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현영희 의원 공천헌금 사건을 시작으로 친박계 좌장격인 홍사덕 전 의원의 공천헌금 수수 의혹, 송영선 전 의원의 돈 요구 정황이 담긴 녹취록 공개 등 연이은 측근 비리로 곤욕을 치렀던 박 후보에게 또 다른 대형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A 의원을 비롯해 현재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은 모두 박 후보의 대권 행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핵심 측근들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따라서 박 후보 캠프 안팎에서는 이왕 ‘물갈이론’이 제기된 만큼 검찰 수사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측근들을 미리 2선으로 후퇴시켜 꼬리를 잘라야 한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박 후보 캠프 관계자는 “‘측근 꼬리 자르기’는 당의 쇄신 목소리를 수용해 내부를 다독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불거질 수도 있는 불미스런 사건의 후폭풍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해법”이라면서 “박 후보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