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떠난 낯선 땅에서 역설적으로 환자를 살리며 삶을 일으킨 성장담
저자 김준일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렌프루 카운티 소속 6년차 파라메딕(응급구조사)이다. 그는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군사용 IT 솔루션의 해외사업개발 등에 몸담으며 12년 동안 사무직 회사원으로 근무했다. 한국 사회가 정해준 길을 나름대로 성실히 걷던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삶의 회의가 찾아왔다. 매일 억지로 하는 출근, 지나친 경쟁, 반복되는 일상에 깊은 삶의 회의를 느낀 저자는 내 방식대로 살아도 문제되지 않는 삶, 실패했더라도 패자부활전이 있는 삶을 찾아 안정적인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서 바로 꿈꾸던 환상적인 삶이 바로 펼쳐질 리 만무했다. 스트립쇼 공연장, 은행 협력업체 사무실, 경기장 주류 판매소 등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 최저시급 받는 일을 전전했다. 낯선 땅에 발을 내딛고 매일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기 3년, 그는 마흔 셋의 나이에 캐나다 시골마을 유일한 한국인 응급구조사가 됐다.
응급구조사가 되어 마주한 삶의 풍경들은 하나같이 잔혹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런 현장을 접하며 환자들의 얼굴을 마주할수록 복잡하게 꼬여 있던 삶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게 된다.
저자는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를 통해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자리를 지키는 응급구조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빛이 들지 않는 지령실에 앉아 신고 현장의 음성을 온종일 들어야 했던 응급구조사, 코카인에 취한 산모 옆 조산아에게 거듭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던 응급구조사, 은퇴 전 출동한 마지막 현장에서 손녀딸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응급구조사 등의 사연이 생생하게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에 직면한 응급구조사들이 그저 돌아서서 외면해 버리거나, 죽음 자체에 무감해지거나, 일을 그만두는 방식으로 비극의 현장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속 응급구조사들은 비극의 현장을 그렇게 떠나버리지 않았다. 명백한 방역 규칙 위반인데도 마스크를 내려서 자살 기도를 한 환자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규정상 안전에 위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현장에 다가가면 안 되지만 불길이 치솟는 사고 차량 안으로, 환자의 집 안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간다. 앰뷸런스 안에서 환자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고, 호스피스 시설로 향하는 환자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기력이 없는 가운데서도 마치 오래 기다린 손님을 마중 나온 듯 밝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환자를 마주한 저자와 동료들의 당황스러움을 담아낸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그 환자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이제 병원에서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호스피스 시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저자는 환자와 대화를 나누며 크게 웃기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환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는 무척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처럼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자신의 마지막을 보내는 다양한 방식이 이 책 여기저기에 담겨 있다. 아픈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 가족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환자도 있고, 동네 할아버지들과 ‘썸’을 타며 일상의 순간을 즐기는 매력적인 할머니 환자도 있다. 전신 발작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얼굴이 익은 응급구조사의 손을 꼭 잡고 “너도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는 환자에게 따뜻한 위로를 얻은 에피소드는 독자들의 마음까지 위로해준다.
총기와 마약 사고가 빈번하고, 의료 현장의 지원이나 응급 처치의 규칙에도 한국과 캐나다는 차이가 크다. 하지만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고 동료와 관계 맺으며 자신과 싸워나가며 쌓아 온 저자의 경험은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자신의 삶 속에서 분투하고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죽음을 잘 맞이하려 노력하는 모습들은 캐나다와 한국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단순히 먼 타지에서 낯선 일을 경험한 저자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자기만의 현장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응원이다.
남궁인 작가(응급의학과 의사. ‘만약은 없다’ 저자)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응급실 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묻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라며 “생사의 현장에서 동료에 의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삶을 위해 분투하는, 고단한 일에도 불구하고 더 고단한 이들을 생각하는, 이것은 인생 그 자체의 이야기이자 비극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우리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