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품 속의 칼은 아직 뽑지도 않았다’
▲ 지난 4월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사건으로 대검찰청에 소환되는 모습. | ||
이번 개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MK 1세대 가신인 박정인 부회장이 컴백하면서 기획조정실장직을 맡은 점이다. 박 부회장은 지난해 정몽구 회장의 수시인사를 통해 고문직으로 물러났던 인물이다. 정 회장이 기획총괄본부 축소개편과 비자금 사태로 얼룩진 조직 추스르기를 위해 대내외적으로 신망이 두터운 박 부회장을 다시 중용한 셈이다.
그런데 박 부회장 컴백을 놓고 내부에선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은다. 일각에선 정 회장 아들 정의선 사장 측 인사들이 박 부회장의 기획조정실장직 임명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다수 재계 인사들은 정 회장의 지난해 수시인사를 정 사장 후계작업 가속화를 위한 작업으로 받아들였던 바 있다. 삼성의 경우 지난해 ‘도피성 외유’ 논란 속에 이건희 회장의 해외 체류기간이 장기화되자 이학수 부회장을 비롯한 이건희 회장 가신 세력의 조직 장악력이 한층 거세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곧 이재용 상무로의 권력승계가 당분간 용이하지 않을 것이란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지난해 현대차의 수시인사가 삼성의 부러움을 샀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오곤 한다.
최근 박정인 부회장의 기획조정실 입성에 대해 정의선 사장 추종세력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정 회장이 박정인 부회장을 재기용한 배경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도 들려온다. 경영일선에 물러났던 MK 1세대인 박 부회장이 과연 그룹 내 2인자격인 기획조정실장직에서 장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재계 인사들의 궁금증이 커지는 것이다.
채양기 사장의 보직 문제 또한 같은 맥락에서 거론되고 있다. 채 사장은 2세대 임원 선두주자로 정 회장의 오른팔로 알려진 인물이다. 채 사장은 박정인 부회장 컴백 직전까지 기획총괄본부 업무를 주관해왔다. 채 사장은 정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번 개편을 통해 채 사장은 경영지원 담당을 맡았다. 직급엔 큰 변화가 없으나 신임 기획조정실장인 박 부회장 밑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정 회장 주변에서 좀 멀어진 셈이다.
이번 비자금 사태를 계기로 정 회장 주변에선 정치권과 수사당국의 동향 파악을 위한 정보라인 강화 중요성이 거론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기획총괄본부 시절 정보수집을 담당해오던 경영정보지원팀은 정책기획팀에 흡수됐는데 이는 채 사장 담당인 경영지원 부서가 아닌 배원기 전무의 인사지원담당 부서로 배속됐다. 아직 현대차 인사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조직 재편이 완료된 것은 아니지만 큰 줄기만 놓고 봤을 때 주요 정보를 채 사장이 정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빈도가 줄어들 것이란 관측도 가능한 셈이다.
채 사장은 현대차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부 업계 인사들은 ‘박 부회장과 더불어 채 사장의 거취가 어떤 변화를 맞이할지 모른다’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업계에선 ‘어차피 정 회장이 아들인 정의선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조직이 안정되는 대로 승계작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이번 개편 결과가 전반적인 조직개편이라기보다는 재판 등 일련의 현대차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의 임시체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수감 중 면회 온 측근에게 몇몇 임원에 대한 서운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검찰조사과정에서 정 회장의 의도와는 다른 발언을 했던 것이 정 회장 귀에 들어갔던 것이며 이때부터 대대적인 내부 책임론이 불거질 것이란 관측이 돌게 됐다. 기획총괄본부 축소 개편을 통해 숨고르기가 끝나면 ‘본격적인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란 이야기마저 나돌고 있다.
이번 조직개편을 통해 기획조정실에서 배제된 인사들 대부분이 CL(카&라이프)팀과 자동차산업연구소 조직으로 옮길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기획총괄본부 소속이었던 CL팀과 연구소 조직은 앞으로 분리 운영된다. 이를 두고 ‘삼성이 구조본에서 법무팀을 분리했지만 결국 사장단 밑에 두고 활용하고 있으니 내용상 구조본에서 분리된 것이라 할 수 없다’는 비판론이 현대차를 향해 재현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일각에선 CL팀과 연구소 조직이 그동안 정보수집 업무도 일정 부분 담당해온 점을 들어 정 회장에 대한 정보보고 라인 강화 차원에서 이번 개편의 의미가 해석되기도 한다.
기획총괄본부에서 ‘총괄’이란 표현이 사라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정몽구 회장의 그룹 장악력이 극대화된 한편 박 부회장은 대외업무에 주력하게 됐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차 내부에선 세부적인 부서개편을 마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축소개편안에 따라 부서별 인원 조정이나 업무분담에 대한 세부 사안의 틀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곧 세부개편안에 대한 발표가 조만간 있을 것이란 추측을 낳게 하며 현대차 직원들을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고 있다. 정 회장의 복심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