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흥행 1~4위 모두 비수기 개봉작…‘파묘’ 6일 만에 292만 동원, 개봉 시기 승부수 통해
어느 업계나 그러하듯, 극장가에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구분된다. 극장가의 대표적인 성수기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다.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극장을 찾는 일이 많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7월 말~8월 초는 직장인들의 휴가철과도 맞물려 1년 가운데 최고 성수기는 바로 이 즈음이다. 반대로 학생들이 바쁜 시기가 비수기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치러지는 기간에는 아무래도 극장가가 한산해진다.
이런 까닭에 엄청난 제작비가 투자된 블록버스터급 영화들 역시 성수기에 몰려 개봉한다. 매년 최대 기대작이 여름에 개봉하는 게 공식처럼 굳어졌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서서히 끝나가던 2022년과 2023년에 성수기를 둘러싼 공식들이 무참히 깨졌다. 여름 극장가에 과도하게 대작 한국 영화들이 몰려서 개봉했다가 동반 몰락하는 상황이 2년 연속 벌어진 것. 2024년 여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한국 영화계는 위기를 넘어 공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영화관계자들은 극장가가 기나긴 침체기에 돌입하면서 성수기와 비수기의 구분이 모호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게 가장 흔한 여가생활인 시절은 지났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은 극장가 성수기일지라도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굳이 비용을 지불하고 극장을 찾지 않고, 비수기일지라도 볼 만한 영화가 있다면 극장을 찾는다.
이런 흐름은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2023년 흥행 10위 안에 든 영화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비수기 개봉 영화가 흥행했다. 118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은 대표적 비수기인 11월 22일에 개봉했으며, 1068만여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3’도 비수기인 5월 31일에 개봉했다. ‘엘리멘탈’(724만여 명)은 6월 14일, ‘스즈메의 문단속’(557만여 명)은 3월 8일에 개봉했다. 이처럼 흥행 1~4위가 모두 비수기 개봉작이다.
5위 ‘밀수’는 성수기인 7월 26일에 개봉했는데 관객수는 514만여 명 수준이다. 6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479만여 명)도 준성수기에 속하는 1월 4일 개봉작이다. 7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421만여 명)와 8위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402만여 명)은 준성수기인 5월 3일과 7월 12일에 각각 개봉했다. 9위 콘크리트 유토피아(385만여 명)와 ‘아바타: 물의 길’(349만여 명)은 성수기인 8월 9일과 12월 14일(2022년)에 각각 개봉했다.
흥행 10위 가운데 비수기 개봉작이 4편, 준성수기 개봉작이 3편, 성수기 개봉작이 3편이다. 성수기와 준성수기, 비수기에 고르게 흥행작이 나오면서 굳이 시기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게다가 비수기 개봉작 4편이 흥행 1~4위를 석권했다.
비수기에 흥행 대작이 더 많이 나온 이유는 장기간 흥행세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2023년 11월에 개봉해 2024년 1월까지 3달 연속 1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하는 흥행세를 이어갔다. ‘범죄도시3’는 5·6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2월, ‘스즈메의 문단속’도 3·4월에 각각 두 달 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렇게 비수기에 장기 흥행이 가능한 이유는 비교적 경쟁작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사들이 대작 영화의 비수기 개봉을 꺼리는 터라 비수기에 한 번 터지면 별다른 경쟁작이 없이 장기 흥행을 이어가곤 한다. 극장을 찾는 관객이 선택의 여지없이 흥행세를 탄 영화를 관람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성수기에는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2022년 여름 성수기에는 ‘외계+인 1부’ ‘한산:용의 출현’ ‘비상선언’이 연이어 개봉했다. 결국 ‘외계+인 1부’는 154만 명, ‘비상선언’은 205만 명의 관객만 동원하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한산:용의 출현’이 승자가 됐지만 726만 명의 관객으로 전편 ‘명량’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이는 성적이다. 오히려 성수기 막바지인 8월 10일 개봉한 ‘헌트’가 43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진정한 승자라는 평을 받았다.
2023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밀수’를 비롯해 ‘비공식작전’ ‘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 4편의 텐트폴 영화가 연이어 개봉했다. 그렇지만 ‘비공식작전’은 105만 명, ‘더 문’은 51만 명의 매우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으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384만 명을 동원하며 그나마 체면치레는 했다. 승자는 ‘밀수’가 됐지만 관객 수는 514만 명으로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2024년에도 대작 한국 영화들이 여럿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우선 ‘범죄도시4’가 눈길을 끄는데 이번에도 성수기가 아닌 4~5월경 개봉할 가능성이 크다. 그 외의 대작들은 이번에도 여름방학 시즌 등 성수기에 개봉이 몰릴 가능성이 여전하다. 아직 여름 성수기 개봉 일정을 확정한 영화는 없지만 벌써부터 ‘하얼빈’ ‘왕을 찾아서’ ‘탈주’ ‘파일럿’ 등 대작 영화들이 거론되고 있다. 또 다시 이번 여름 성수기에도 한국 영화 대작들끼리 격돌해 동반 흥행 실패라는 늪에 빠질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파묘’의 행보가 더욱 눈길을 끈다. ‘파묘’는 제작비 규모가 140억 원대로 손익분기점이 330만 명에 이르는 대작이다. 그렇지만 제작 및 배급을 맡은 쇼박스는 비수기인 2월 개봉을 결정해 개봉 6일 만에 292만 8378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할리우드 대작 ‘듄: 파트2’와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손쉽게 손익분기점은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다른 한국 영화들도 비수기와 성수기 경계가 무너진 극장가의 상황을 감안해 성수기에만 집착하지 말고 탄력적이고 과감하게 개봉 시기를 잡는 승부수가 절실해 보인다.
김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