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분 공평 배분·일반주주 의결권 행사 등 승계 원칙·자본시장 흐름 변화가 경영권 분쟁 ‘촉매제’
경영권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기업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지배주주 일가의 경영권 다툼은 지분율과 관련이 깊다. 과거에는 최대주주가 지주사 지분을 물려줄 때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큰 아들에게 지분을 몰아주는 경향이 강했다. 최근에는 자식들에게 지분을 공평하게 배분하는 경우가 많다. 최대주주의 배우자가 지분 상속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드물다. 승계 과정에서 분배된 엇비슷한 지분율은 지배주주 구성원 간 경영권 다툼의 발단이 되고 있다.
지난 3월 28일 열린 한미약품그룹의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는 투자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배주주 일가인 어머니와 아들이 경영권을 두고 갈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친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딸 임주현 부회장은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의 통합을 추진했다. 두 아들 임종윤 사장과 임종훈 사장이 이를 반대하면서 갈등이 격화됐다. 두 아들이 추천한 5명의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하면서 승패가 갈렸다.
한미약품그룹의 갈등은 지배주주 간 상속이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임성기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임 창업주의 한미사이언스 지분 34.27%가 유가족에게 상속됐다. 최대주주인 임성기 창업주와 2대주주인 임종윤 사장 간 지분 격차가 30% 이상 차이가 나 경영권 분쟁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상속 과정에서 최대주주와 2대주주 간 지분 격차가 크게 줄었다.
임성기 창업주의 부인 송영숙 회장이 가장 많은 지분을 상속받으면서 최대주주가 됐다. 기존 1.26%에서 상속 후 11.20%로 지분율이 늘어난 것. 상속 전 2대주주였던 장남 임종윤 사장은 기존 3.65%에서 상속 후 8.53%로 증가했지만 그대로 2대주주에 머물렀다. 어머니와 지분 격차는 2%포인트 가량이었다. 최대주주와 2대주주 사이의 지분 격차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 입장 차가 경영권 분쟁으로 확대됐다.
한미약품그룹 지배주주 일가가 확보하고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62.53%다. 고 임성기 명예회장의 지분 절반(약 17%)을 상속세로 현물 납입해도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은 45% 정도여서 지배력에 큰 문제가 없다.
아워홈 지배주주 일가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지분을 바탕으로 몇 해간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한국앤컴퍼니(한국타이어그룹)도 창업주 조양래 명예회장이 자녀들에 증여한 후 경영권 갈등의 징후를 보였다. 한진그룹 역시 조양호 회장의 별세로 지분을 상속받은 자녀 간 지분율이 엇비슷해 경영권을 두고 진통을 겪었다. 금호석유화학도 마찬가지다. 지배주주 구성원 간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아 경영권 분쟁의 씨앗이 됐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와 대비된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대기업 최대주주는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해 승계 작업을 진행했다”며 “최근에는 비교적 자녀에게 지분을 공평하게 나눠주려는 경향을 보일 뿐 아니라 자녀 중 누군가 다른 자녀보다 지분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해 분쟁이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고 분석했다.
갈등이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있게 힘을 실은 것은 외부투자자의 힘이다. 외부투자자는 75년간 동업관계였던 고려아연 지배주주 일가 사이를 갈라놨다. 그동안 고려아연의 경영은 최씨 일가가 담당하고, 최대주주 역할은 장씨 일가가 맡아 왔다.
동업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장씨 일가 측이 확보한 고려아연 지분(약 30%)이 최씨 측 직접 보유 지분(약 14%가량)을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다. 최씨의 우호세력으로 분류되는 외부투자자들이 고려아연 지분 약 12%를 확보하면서 장씨와 최씨 간 지분 격차가 1%포인트로 줄어들자 양 측 갈등이 고조됐다. 경영권 분쟁시 외부투자자가 참전하는 경우는 고려아연 사례뿐 아니라 금호석유화학, 한미그룹, 한진그룹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자본시장의 인식 개선에 따라 일반주주들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점도 경영권 분쟁에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지배주주 간 경영권 분쟁시 지분율이 다소 낮더라도 일반주주들의 지지에 힘입어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어서다. 실제 이번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한 것은 일반주주들이었다. 당초 아들 측은 어머니 측보다 지분이 2% 가량 부족했지만 일반주주들이 편을 들어주면서 주총에서 이겼다.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에서도 양측이 일반주주들을 서로 설득 작업을 벌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동안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면 경영에 참여하지 못한 측은 주주명부를 확보하기 어려워 일반주주를 설득하기 어려웠다. 최근에는 분쟁시 주주명부를 제공하도록 판례가 정착돼 큰 어려움 없이 주주들을 확인해 설득 작업을 벌일 수 있다. 투자업계 다른 관계자는 “현재 일반주주의 참여율이 높다고 할 수 없지만 투자자들의 인식이 개선되면 영향력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면서 “그런 만큼 갈등을 겪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향후 (최근 벌어지는 것과 같은) 경영권 분쟁을 겪는 곳이 늘어날 것”이라면서 “분쟁을 겪는 과정에서 일반주주들의 권익이 더욱 향상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