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기생수’ 마동석 ‘황야’ 전종서 ‘발레리나’ 등…높아진 입맛 맞추다보니 유럽·영미권 팬까지 확보
여러 화제작에 참여했던 한 드라마 제작진의 이야기다. 최근 국내 드라마 제작 판이 말 그대로 ‘아사리판’이 났다지만, 해외 시장을 겨냥한 곳은 어느 정도 숨 쉴 틈을 마련한 상태다. 그 기반에는 K드라마를 포함한 K콘텐츠에 여전한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해외 시청자들이 있다는 게 드라마 제작진들이 모두 입 모아서 하는 말이다.
국내에선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작품이더라도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을 타고 해외에 공개되면 방영 기간 내내 적지 않은 국가의 시청 상위권을 ‘당연하게’ 지키고 있다. 특히 해외 한류의 오랜 지지층이었던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뿐 아니라 유럽 및 영어권 국가도 한국 드라마에 ‘콘크리트 시청층’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게 최근 수년 동안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이기도 하다. 국내 드라마 제작업계 역시 이 지점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국내외 OTT 플랫폼의 막강한 아성을 이룩한 넷플릭스의 경우 이런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앞서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시기 유례없는 신드롬을 일으켰던 ‘오징어 게임’(2021)을 시작으로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에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해외 콘텐츠 대비 현저히 적은 투자비로도 초대형 작품과 맞먹는 글로벌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우선 ‘양적’으로도 타 OTT 서비스보다 더 많은 한국 작품을 확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연출자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제일 먼저 연상호 감독이 떠오를 것이다. 영화 ‘부산행’(2016)으로 시작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및 영화로 ‘지옥’(2021), ‘정이’(2023), ‘선산’(2024), ‘기생수: 더 그레이’(2024)를 연달아 내놓은 연 감독은 국내에선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감독으로 꼽힌다. 뚜렷하고 독창적인 세계관과 감각적인 소재를 가지고 흡인력 있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지나친 신파 클리셰와 납작하고 매력 없는 캐릭터성, 기발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데에는 다소 부족한 뒷심 등이 한국 시청자들 사이에선 큰 단점으로 꼽혔던 탓이다.
반면 국내에선 평이 갈릴지라도 그의 해외 성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21년 공개한 ‘지옥’은 ‘오징어 게임’에 이어 넷플릭스 TV 시리즈 두 번째 월드랭킹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고, 신파 코드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영화 ‘정이’도 공개 첫날 시청 순위 1위 자리를 거머쥐었다.
가장 최근 작품인 ‘기생수: 더 그레이’ 역시 공개 첫날 기준으로 미국 넷플릭스 TV쇼 부문 2위, 플릭스패트롤(전세계의 VOD, OTT 드라마 또는 영화의 시청률을 순위화해 집계하는 사설 웹사이트) 기준 글로벌 1위에 오르며 한국 감독 가운데 최초로 작품 공개 첫날 1위를 세 번이나 달성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올해 넷플릭스의 대작으로 기대돼왔던 오리지널 영화 ‘삼체’의 기록을 넘어선 수치다. 올 하반기에는 해외, 특히 유럽 국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지옥’의 두 번째 시즌도 공개를 앞두고 있다.
국내와 해외의 반응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다른 한국 OTT 오리지널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배우 마동석의 첫 넷플릭스 영화 ‘황야’(2024)도 “액션 빼고는 볼 만한 게 전혀 없는 영화”라는 국내 혹평이 이어졌지만, 해외 성적은 공개 3주 연속 비영어권 시청 1위, 2주 차 글로벌 랭킹 1위로 마무리됐다. 흥행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더라도 해외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데엔 충분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마찬가지로 스토리의 빈약함으로 지적 받았던 전종서의 영화 ‘발레리나’(2023)도 해외에선 뛰어난 액션 연출이 호평을 불러오며 공개 2주 차에 한국 영화 최초로 영화 부문 글로벌 1위에 올랐다.
국내 콘텐츠 제작업계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2020년 초)부터 급성장한 K콘텐츠에 대한 이 같은 해외 반응을 꾸준히 주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의 콘텐츠 수출 시장이었던 중국과 일본, 대만, 홍콩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확장돼 유럽 및 영어권 국가가 K콘텐츠의 새로운 ‘콘크리트 시청층’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목 포인트라는 게 업계인들의 이야기다. 코로나19 이전까지는 이런 시청층이 해외 K팝 팬덤과 사실상 동일한 마이너 그룹으로 묶였던 반면 현재는 세대별, 연령별, 인종별, 문화권별로 세분화될 수 있는 거대한 ‘K콘텐츠 시청 카테고리’가 구축됐다는 것.
익명을 원한 또 다른 드라마 제작 관계자는 “한국인들은 가족애를 강조한 지나친 신파나 사랑하는 연인의 불치병, 부부간 불륜과 고부갈등 등 클리셰와 막장 코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해외에선 여전히 먹히는 소재”라며 “단순히 소재로만 접근한다면 해외 콘텐츠에서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인 만큼 해외 시청자들에겐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런 해외 시청 층을 중점 공략하기 위해 기존의 한국 시청자들과 그들의 반응을 홀대한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 점에 대해서 앞선 관계자는 “한국 시청자들의 콘텐츠 만족 기준은 굉장히 엄격하고 높은 편이기 때문에 그 수준에 맞추기 위해 K콘텐츠도 꾸준히 성장했고, 그 덕에 해외에서도 사랑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에선 안 먹히니까 해외를 공략하자’는 얄팍한 생각은 애초에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업계인들이 목표하는 바가 ‘한국에서도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작품’인 만큼 꾸준한 피드백을 통해 작품 제작이 계속 이뤄질 것”이라고 답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