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다 여름 한때 죽쒔던 말 ‘주목’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가을철 컨디션 회복마의 백미는 지난 7일 서울경마 6경주에서 오랜만에 우승하면서 고배당을 터트린 천하강적(조교사 박흥진)이다. 천하강적은 이 경주에서 단승식 46.3배, 연승식 7.1배로 팔릴 만큼 인기순위가 거의 최하위권(8위)였지만 장기인 선두력을 살려 일착으로 골인했다. 인기 2위마가 2착을 차지했음에도 복승식 57.3배, 쌍승식 276.6배, 삼복승 71.6배를 기록했다. ‘새가슴’인 필자는 연승식 적중에 만족했지만 과감한 베팅을 한 경마팬들은 충분히 하루의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배당이었다.
천하강적은 뛰어난 기수가 탔던 것도 아니었다. 서울경마장에서 최하위권 기수로 분류되는 유미라 기수가 기승한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었다. 천하강적은 데뷔초 빠른 발을 갖고 있어 앞으로 활약할 마필로 어느 정도 기대를 모았지만 오랫동안 부진했고, 지난 6월 3착을 마지막으로 입상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7월과 8월 두 차례 경주에 출전했지만 모두 6착을 차지했고, 9월 1일 경주에선 경주능력이 저하된 모습을 보이면서 7착을 기록했다.
여름 기간에 출전한 경주결과가 최악은 아니었지만 예전만큼 뛰지 못했고 당시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현장상태를 관찰했던 한 전문가는 “천하강적은 지난 세 차례 경주에서 모두 활기가 부족하고 투지를 별로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던 천하강적이 지난 10월 7일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표시가 날 만큼 ‘쭉쭉빵빵’ 최상의 모습으로 출장을 했고 그동안의 부진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승을 차지했다. 천하강적의 컨디션이 좋았다는 것은 경주 전개를 봐도 알 수 있다. 천하강적은 유미라 기수의 어설픈 말몰이에도 불구하고 같이 출전한 빠른 말들을 제압하면서 데뷔초 보여줬던 선두력으로 어렵사리 선행을 나섰다. 이 과정에서 유 기수가 욕심이 다소 앞서 다른 말을 약간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행을 장악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마필의 힘과 투지가 회복됐다는 것을 반증했다. 직선주로에서도 지치지 않는 근성을 보였다. 예전 같으면 그 정도 페이스면 막판에 덜미를 잡혔을 테지만 천하강적은 오히려 더 힘을 내면서 추격마들을 2마신이나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컨디션이 살아났고 걸음도 성장했던 것이다.
지난 9월 23일 서울경마장 제9경주로 치러진 동아일보배 대상경주의 이변에도 컨디션 회복마가 숨어있었다. 우승마는 ‘여의주’(조교사 우창구)라는 경주마였는데 이 말은 비교적 빠르게 2군 무대까지 진출하고 2군 강자들과도 대등한 전력을 보이면서 착순권에 오르내릴 만큼 꾸준한 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난 7월엔 비교적 약체들을 만나서도 부진했고(6착), 8월엔 4위로 도착해 순위는 좀 나아졌지만 1위마와의 거리는 5마신(약 13미터) 가까이 벌어졌다. 특히 8월 경주에선 오경환 기수가 스타트를 잘 끊은 다음 선입권에 붙어서 힘 안배를 하면서 최적의 경주전개를 했음에도 직선에서 걸음이 무뎌졌다. 그야말로 ‘최선에 최선’을 다한 경주였기 때문에 이 경주 이후 여의주는 완전히 ‘하한가’로 돌아섰다. 경마전문가들도 소위 ‘맛이 간’ 마필로 분류했다. 하지만 여름 내내 여의주는 눈에 확 띄지는 않았지만 봄철에 비해 활기가 부족했고 투지마저 보이지 않아 어떤 면에선 기본능력으로 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9월 대상경주를 앞두고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됐고 조교도 충실히 했다. 물론 결과는 앞서 얘기한 대로 일착이었다. 여의주는 단승식 21.6배로 인기순위가 8위였다. 특히 이 경주에선 배당판을 좌우하던 상대적 인기마(능력에선 우위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예상순위에서 공통적으로 앞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인기마가 된 마필)들이 모두 입상권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고배당(복승식 128.8배, 쌍승식 499.4배, 삼복승식 567.6배)이 터졌다.
김효섭 조교사가 관리하는 ‘하얀누리’라는 말도 지난 행적을 보면 컨디션 회복마에 속한다. 이 말은 지난 1월 1200미터 경주에서 강자들과 겨뤄 외곽을 주행했음에도 끈기를 보이며 좋은 기록으로 2착을 차지했다. 당시 경주 직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걸음이 확실히 달라졌다는 평가를 했다. 그리고 올 2월과 3월 경주에선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며 연이어 2착을 했다.
하지만 이후 휴양에 들어갔고 8월 2일 복귀전을 치렀지만 9착에 그치고 말았다. 2주 만에 출전한 8월 12일 경주에선 체중이 무려 21㎏이나 빠지면서(511→490㎏) 꼴찌 다음 순위인 10위를 기록했다. 두 차례 모두 선행형 마필 특유의 활기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였다. 9월 1일 경주에서도 이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장기인 선두력은 살아나 경주 내내 선입권에서 전개했고 착순도 6위로 좋아져 다음 경주에 대한 약간의 기대치를 갖게 만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지난 10월 7일 1300미터에 출전했다. 지난 번의 가능성 때문인지 인기순위 4위로 경마팬들의 관심권이었다. 하지만 단승식이 7.8배나 될 만큼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이 경주에서 하얀누리는 새벽훈련을 다른 때보다 더 강하게 하면서 구보량을 늘렸는데도 체중이 505㎏까지 회복돼 출전했고, 컨디션도 좋아보였다. 훈련을 강하게 하면 체중이 줄어드는 것이 보통인데 하얀누리는 오히려 늘었던 것이다. 가을철이 되면서 식욕이 살아났고 그 덕분에 강한 훈련도 잘 소화해낸 것으로 보여졌다. 실전에서 하얀누리는 초반부터 빠르게 질주해 선행을 나섰고 이후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처럼 경마에선 과거에 잘 뛰었던 경주마가 고배당을 터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이들 마필은 다음 경주에서도 선전할 가능성이 높다. 딱 한번 잘 뛰었기 때문에 경주력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의문이 남아있어 믿음이 덜 가기 때문에 배당도 제법 짭짤하게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거론한 마필들은 그런 측면에서 다음 경주 출전 때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김시용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