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집안단속 성공, 범야권 재추진 의지…‘격노설’ 기정사실화로 특검 도입 명분 쌓이는 중
‘순직해병 수사방해 및 사건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채 해병 특검법’이 결국 최종 폐기됐다. 제21대 국회는 5월 28일 임기 마지막 본회의를 열고 ‘채 해병 특검법’ 정부재의안을 다시 표결했다. 무기명 투표 결과 재석 의원 294인 중 찬성 179표, 반대 111표, 무효 4표로 부결됐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5월 21일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로 돌려보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재의결되려면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때는 처음 표결과 달리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다.
국민의힘은 집안 단속에 나섰다. 21대 국회 구성상 의원 전원이 표결에 참여했을 경우, 여당 의원 113명 중 17명 이상이 ‘가결’을 던지면 재의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 추경호 원내대표는 의원 113명에 개별적으로 접촉해 부결 투표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의원총회 개최 등 통상 절차를 무시하고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 반대 입장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그럼에도 여당 내에서 김웅 안철수 유의동 최재형 김근태 의원 등이 공개적으로 재표결에 찬성표를 행사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민주당에서도 이번 총선에서 낙선·낙천한 국민의힘 의원 58명을 중심으로 이탈표가 10명 안팎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막상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이날 본회의에 출석한 범야권 의원은 현재 구속수감 중인 윤관석 의원과 총선 컷오프에 반발해 탈당한 이수진 의원을 제외하고 179명이었다. ‘가결표’ 수 179표와 같다. 범야권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웅 의원은 본회의 이후 찬성투표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론이 진정 옳은 것이라면, 진정 부끄럽지 않다면 나를 징계하시라”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 외에 4명의 의원들도 가결을 적었다면, 오히려 야당에서 부결을 행사한 이탈표가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민주당은 내부 이탈표는 없다고 일축했다. 그동안 채 해병 특검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의원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 민주당 한 관계자는 “이번 총선 낙선·낙천한 의원 중에 서운함을 가진 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해병대 수사외압 의혹의 문제점은 민주당 내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올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무효표 4장에 시선이 모아진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국민의힘 찬성파 의원 5명 가운데 4명이 무효표를 만들고, 나머지 1명은 결국 당론에 따라 반대표를 던졌다고 추정했다. 실제 무효표는 ‘가’ ‘찬’ ‘부’와 함께 점이나 괄호 등 다른 기호가 적혀 무효로 분류됐다. 이에 여당 일부 의원들이 찬성 의사를 표시하면서도, 당론을 따르기 위해 무효 처리되게끔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에서 가결 정족수를 크게 밑돈 것이 사실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여당 장악력이 아직 건재함을 확인했다는 평가다. 야권 관계자는 “총선 참패 이후 윤 대통령이 레임덕에 직면했다는 말도 나왔지만,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진 취임 3년 차 현직 대통령이다. 여당 의원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채 해병 특검법 재의안 국회 부결 이후 연합뉴스에 “당과 대통령실은 국가 대의를 위한 책임을 다하는 공동운명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윤 대통령은 5월 16일 국민의힘 수도권과 대구·경북(TK) 초선 당선자들과 만찬 자리에서 “108석이라는 숫자에 위축되지 말라. 뒤에 정부가 있고, 내가 돕겠다”며 “대통령의 거부권과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적극 활용하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2대 국회에 입성하지 못한 낙선·낙천 의원들도 굳이 찬성표를 던져 윤 대통령과 대립할 이유가 없다. 정가에선 이들 중 일부가 장관이나 공공기관장 등 공직 자리를 기대하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실제 기관장이나 임원이 공석인 공공기관은 60~70곳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첫 리더십 시험대에서 여당의 단일대오를 지켜내며 합격점을 받았다. 하지만 고비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을 비롯한 범야권은 채 해병 특검법 재의결이 무산되자, 22대 국회에서 재발의하겠다고 나섰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재표결 직후 “이번 특검법 부결로 분명해진 것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바로 해병대원 수사 외압의 범인이라는 사실”이라며 “민주당은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해병대원 특검법을 재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5월 30일 임기가 시작되는 22대 국회는 범야권 의석수가 총 192석 여당은 108석으로, ‘여소야대’ 지형이 더욱 심화된다. 재적 의원 전원 출석 시 여당에서 8석만 이탈해도 대통령 거부권은 무력화된다.
하지만 22대 국회라고 해서 특검법에 찬성 의견을 내는 여당 의원이 다수 나올지는 미지수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당하면서 보수정당은 궤멸에 가까운 위기를 겪었다. 채 해병 특검이 진행되면 사실상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국면으로 돌입한다.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재의결에서 여당 의원들이 섣불리 찬성표를 던지지 못했다고 본다. 22대 국회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22대 국회에서도 ‘민주당 입법→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재표결 부결’의 여야 강대강 대치가 이어질 것이라는 취지다.
다만 채 해병 사건 외압 의혹 수사의 칼날이 윤석열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향후 특검법 거부권 행사에 부담이다. 최근 언론보도 등을 통해 공개된 각종 증언과 녹취록 등으로 ‘VIP 격노설’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8월 해병대 수사단이 채 해병 사건 기록을 경찰에 이첩한 당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과 개인 휴대전화로 세 차례 통화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윤 대통령에 대한 수사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특검 도입의 명분도 쌓이는 중이다.
실제 채 해병 특검법 거부권 행사가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발목을 잡고 있는 모양새다. 한국갤럽이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 직무수행’에 ‘잘하고 있다’ 평가가 24%에 머물렀다. ‘잘못하고 있다’는 67%를 기록했다. 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평가가 지난 4월 총선 이후 한 달 넘게 20%에 머물고 있다. 대통령 직무수행 부정 평가자들에게 선택의 이유를 묻자 ‘거부권 행사’가 7%로 4위에 올랐다
조원씨앤아이가 스트레이트뉴스 의뢰로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를 봐도 ‘해병대원 특검법 찬반’에 대해 찬성이 66.3%, 반대가 26.9%로 나타났다(여론조사의 자세한 사항은 여론조사기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