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는 구체적인 형상을 빼버리는 그림이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을 실감나게 재현하거나, 신화나 문학적 이야기 혹은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구체적인 형상을 그린 그림을 구상화라고 한다.
구체적 이야기 즉 내용이 있는 그림이 구상화이니, 추상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는 그림을 말한다. 따라서 추상화는 감상을 위한 미술이 아니다. 순수 추상화를 보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추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화면 구성이나 제작 방법 같은 것을 찾아내면 된다. 즉 점, 선, 면 그리고 색채 배열의 조화로움이나 어떤 재료와 기법으로 제작했는지를 염두에 두고, 이것이 새로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 ‘조형’이라고 부른다.
조형의 근본을 추적해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만나는 추상미술이 ‘절대주의’다. 이 계열을 대표하는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캔버스를 ‘흰색 위의 흰색’이란 제목으로 발표해 순수추상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추상은 더 나아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추상미술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한 방식 중 하나로 살아남았고, 금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추상미술이 건장한 현대미술로 자라나는 데 자양분 역할을 한 것은 재료와 기법의 다양한 실험이었다. 이를 ‘방법론적 회화’라고 부른다. 작품의 결과보다는 어떤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느냐에 가치를 둔다. 미술사에서는 1960년대 서구에서 유행한 미니멀리즘 미술을 말한다.
이는 우리 현대미술의 중추 역할을 했던 추상미술이기도 하다. 방법론적 회화는 금세기 초부터 우리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재조명 됐다. ‘단색화’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한국 미감을 대표하는 회화로 대접받고 있다.
단색화는 엄밀히 말하면 이미 1960년대 서구에서 나온 ‘모노크로미즘’의 우리말 버전인 셈이다. 그리고 방법론적 회화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원태의 작업도 방법론적 회화에 속한다. 그는 진득한 작가 정신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방법을 택한다. 물감의 물성을 최대한 담아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기존의 방법론적 회화와는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그는 방법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법론적 회화를 선택했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껍질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했다. 소나무 껍질에서 모티브를 얻어 물감을 켜켜이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추상회화를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인생의 역사를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방법론적 회화의 역설을 보여주는 이원태의 작업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새로운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