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 기사는 충암 출신과 비 충암 출신이 있다
▲ 2003년 7월 충암 동문 기사 300단 돌파 기념식에서 바둑부를 만든 두 주역 이홍식 이사장(오른쪽)과 김수영 사범(작고)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 2008년 5월 동문 기사 500단 돌파기념 축하연에서 동문 기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충암의 기재들이 계속 입단할 것이니 멀지 않아 한국 바둑의 총본산은 한국기원이 아니라 충암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동안 따로따로였던 허장회, 최규병-유창혁, 양재호 도장이 얼마 전에 ‘충암바둑도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면서 실리와 세력을 동시에 불렸다. 충암의 면면을 살펴본다. 졸업 연도순.
▲9단 : 허장회 정수현 김동면 정대상 조대현 강만우 최규병 양재호 유창혁 김영환 김승준 이상훈(하호정 3단의 남편) 윤현석 김영삼 이창호 윤성현 김성룡 양건 이성재 김명완 안조영 강지성 조한승 이희성 박정상 김주호 최철한 원성진 박영훈 조혜연(여) 송태곤 허영호 백홍석 이영구 윤준상 박정환. 이창호는 가운데 묻혀있고 박정환이 말석이다. 홍일점인 조혜연이 빛난다.
▲8단 : 이상훈(이세돌 9단의 형) 김만수 서무상 백대현 한종진 안영길 이정우 염정훈 홍민표 홍성지 김지석
▲7단 : 김학수 이용찬 홍장식 옥득진 이재웅 온소진
▲6단 : 최문용 이용수 최원용 주형욱 김기용 진동규 김혜민(여) 김형우 한상훈
▲5단 : 문용직 현미진(여) 유경민 김효곤 박진솔 서건우 박정근 전영규 박승화 김대희 진시영 홍기표 강유택. 이 가운데 문용직 5단은 2008년 사퇴했다.
▲4단 : 김성래 공병주 유재성 박지훈 이다혜(여) 배준희 손근기 김은선(여) 최기훈 이원도 이춘규 김세동 한웅규 안성준 김기원 김수용 이태현
▲3단 : 김동희 김환수 강창배 김수진(여) 이현호 김현섭 권형진 윤찬희 김정현 이슬아(여) 이원영 한태희
▲2단 : 백지희(여) 김세실(여) 고주연(여) 이형진 허진(여) 김미리(여) 최정(여) 김동호 나현 강승민 황재연 조인선 민상연 강병권
▲초단 : 최동은(여) 김누리 김채영(여) 이동훈 류수항 이범진 김원빈 신민준 오유진(여) 신진서
충암고 출범은 1965년. 1914년 함경북도 명천 태생으로 소년 시절 만주에서 고학을 하면서 행상으로 돈을 모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며 민족의 미래를 품고 귀국해 교육계에 투신, 해방 전후부터 1970년 타계할 때까지 교육 현장과 교육 행정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인관 선생이 충암의 설립자다. 충암(沖岩)은 설립자의 아호이며, 설립자가 타계한 후 설립자의 뜻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충암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 설립자의 장남 이홍식 이사장(71)이다.
충암에 바둑부가 생긴 것은 1971년. 첫 번째 바둑 장학생은 허장회 9단(56)이고 프로입단 제1호는 1973년, 정수현 9단(57)이다. 77년에 입단한 허 9단은 현재 충암 바둑부의 맏형이자 세칭 ‘충암사단’의 사령관으로 후배들을 지도-격려하고 있고, 정 9단은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바둑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고 있다.
충암은 1993년 6월에 동문 단 합계 100단을 돌파했다. 6년 후 99년 2월에 200단, 2003년 7월 300단, 2005년 7월 400단, 2008년 5월에 대망의 500단을 돌파했고, 이번 시즌에 700고지를 넘어섰다. 100단부터 700단까지 돌파 주기에 당연히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3년 정도면 1000단 돌파다. 요즘 한국기원은 한국 근-현대바둑사 복원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바둑계와 인연을 맺었던 인사들을 찾아 회고의 육성을 필름에 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의 하나다. 역사복원팀은 엊그제 이홍식 이사장과 인터뷰했다. 충암의 이사장이면서 1982~83년에는 한국기원 이사장이기도 했으니 우선 취재 대상일 수밖에 없다. 들려주는 비화와 일화가 흥미 만점이다.
“…1971년 11월인가요… 작고하신 김수영 사범이 찾아왔어요. 이웃에 사는 분이라 평소에도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지요. 김 사범이 ‘조만간 바둑이 빛을 보게 될 터이니 학교에 바둑부를 한번 만들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일인데도 선뜻 그러자고 했어요. 저도 바둑은 어릴 때 선친께 배웠지요. 선친은 엄격한 분이셔서 제가 선친을 아주 어려워했는데도, 바둑 둘 때만큼은 선친과 웃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좋아서 바둑도 꽤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몇 년 지나서 제가 이기게 되었는데, 선친께서 백을 들고 먼저 두셨지요…하하하… 조남철 선생이 김인 도전자에게 국수 타이틀을 넘겨 줄 때, 조 선생은 이 판은 질 수 없다, 그런 날에는 항상 가죽점퍼를 입으셨는데, 그 날도 그랬어요. 그런데 지셨어요. 얼마나 허탈해 하시던지. 약주도 잘하시는 분인데, 그 날은 드시질 않는 겁니다. 옆에서 제자 김수영 사범이 ‘선생님,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인디언 추장들은 후계자가 나타나면 결투를 하는데, 결투를 하다가 죽게 되더라도, 훌륭한 후계자가 나타난 게 좋아서, 웃으면서 죽는답니다. 선생님도 웃으십시오…’ 그렇게 위로를 하고 그래도 안 드시더라구요…^^ 허장회 9단이요? 모범생이었습니다. 바둑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바둑책만 보는 것 같았거든요…”
이홍식 이사장 다음이 김우중 총재-서정각 이사장이다. 김 총재는 프로기사 복지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프로기사는 자긍심을 갖게 되고, 프로기사에 대한 사회일반의 인식도 크게 바뀌게 되었고, 그게 한국 바둑 비상의 시동이었다. 이홍식 이사장이 시대적 가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오늘의 평가다.
“충암 바둑부요? 좌고우면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 하나를 자율적으로 열심히 하자는 게 제 지론입니다. 전문가가 중요한 시대 아닙니까. 그래야 전문가 대접을 받지요. 학교 공부는 기본 소양을 갖추는 정도면 됩니다. 또 저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간섭하는 건 안 좋습니다. 창의성이 없어집니다… 전… 충암 바둑이 성공이라고 말씀들을 해 주시까, 그렇다면 제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도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지요.”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