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가속기 2위 AMD와 협력 구축 ‘반사이익’ 기대…첨단 패키징까지 책임지는 턴키 서비스 수주 사활
#엔비디아 차세대 AI 가속기 생산 지연
지난 8월 2일(현지시각) 미국 정보기술(IT)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미국 엔비디아가 고객사에 차세대 AI 가속기인 ‘블랙웰 GB200’ 생산 지연 사실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블랙웰 GB200 시제품 생산과정에서 뒤늦게 문제를 발견해 블랙웰 시리즈가 당초 계획보다 3개월 늦은 내년 1분기에나 고객사에 인도될 전망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메타 등 블랙웰을 주문한 고객사들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블랙웰 시리즈는 지난 3월 젠슨 황 엔비디아 CEO(최고경영자)가 “새로운 산업혁명의 엔진”이라고 강조하며 공개한 AI 가속기다. AI 가속기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 등을 붙여 만드는 AI 전용 반도체 패키지다. 블랙웰 시리즈는 GPU에 총 192기가바이트(GB) 용량의 5세대 HBM ‘HBM3E’ 8개를 패키징한 ‘B100’ ‘B200’과 B200 2개에 중앙처리장치(CPU)를 붙인 GB200으로 구성된다. 현재 엔비디아 제품 중 가장 앞선 ‘H100’과 ‘H200’ 등 호퍼 시리즈보다 성능이 뛰어나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 법무부는 엔비디아의 반독점법 위반 혐의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도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AI 가속기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미 법무부는 엔비디아가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 업체에 자사 제품을 구매하도록 압력을 가했는지, AMD와 인텔 등 경쟁사 제품을 구매하는 기업에 더 높은 비용을 청구했는지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엔비디아 대체품을 찾으려는 ‘탈 엔비디아’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엔비디아 경쟁사인 미국 AMD로 눈을 돌리는 업체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MS는 AMD의 AI 가속기 ‘MI300X’를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 AMD는 올해 4분기 차세대 AI 가속기 ‘MI325X’를 출시할 예정이다. MI325X에는 총 288GB 용량의 HBM3E 8개가 탑재될 것으로 전망된다. 구글과 메타 등 빅테크 업체들은 자체 AI 칩 개발에 나섰다.
AMD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 온 삼성전자 역시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AMD의 AI 가속기 ‘MI300’에 HBM3를 납품하고 있다. MI325X에도 삼성전자 HBM3E가 탑재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AMD GPU 파운드리나 첨단 패키징은 대만 TSMC가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AMD의 협력이 늘어날수록 AMD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도 고려해볼 여지가 생긴다. 삼성전자는 GPU를 생산하고 HBM을 공급한 뒤 패키징까지 책임지는 턴키 서비스 수주에 사활을 걸고 있다.
권영화 세종대 경영전문대학원 대우교수는 “AMD가 삼성전자에 파운드리까지 맡기면 비용과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TSMC가 엔비디아 물량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다른 고객사는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성철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연구위원은 “AMD는 3나노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공정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TSMC에 파운드리 주문량이 폭증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에 HBM 주문이 늘어나면 파운드리도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HBM3E 양산 충분한 시간 확보"
블랙웰 출시 지연으로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3E를 안정적으로 양산할 시간을 벌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는 3분기 중 엔비디아로부터 HBM3E 최종 승인을 받아 4분기부터 양산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3E를 납품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로이터는 최근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HBM3E 8단 퀄(품질)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블랙웰 제품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디인포메이션은 엔비디아 AI 가속기 설계 문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미국 반도체 연구 기업 세미애널리시스는 TSMC 패키징과 엔비디아 설계 문제가 종합적으로 얽힌 문제라고 밝혔다. 엔비디아 AI 가속기는 TSMC의 ‘CoWoS’ 패키징 공법을 통해 HBM과 GPU를 연결한다. 블랙웰 제조에는 TSMC의 CoWoS를 업그레이드한 ‘CoWos-L’이 처음 도입된다. CoWos-L은 넓은 기판인 실리콘 인터포저 위에 GPU와 HBM 등을 집적하는 2.5D 패키징 기술이다. TSMC 공정 문제라면 엔비디아와 TSMC의 신뢰 관계에 사소한 균열이 생기는 셈이다.
엔비디아 대체품을 찾는 업체들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시장 영향력은 막강하다. 삼성전자가 턴키 서비스를 토대로 엔비디아 파운드리 물량 추가 수주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엔비디아 GPU ‘지포스 RTX 30’은 삼성전자의 8나노(nm·10억 분의 1m) 공정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최첨단 공정 파운드리를 모두 TSMC에 맡기고 있다. 엔비디아 H100과 A100은 각각 TSMC의 4나노, 7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졌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아이큐브(I-Cube)’라는 이름의 2.5D 패키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면 추후 파운드리까지 수주를 노려볼 만하다”며 “삼성전자로서는 이런 전략을 짜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당장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파운드리 물량을 대량 수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권영화 대우교수는 “삼성전자 입장에선 HBM과 GPU 생산까지 한 번에 해주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삼성전자도 3나노 수율이 70%까지는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라면서도 “엔비디아와 TSMC의 동맹이 워낙 견고해 단번에 삼성전자로 파운드리 물량 전환이 일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여전히 적자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증권가에 따르면 지난해 시스템LSI·파운드리 사업부의 영업손실은 2조 원을 넘었다. 올해 2분기에도 200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 관계자는 “턴키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턴키 서비스를 활용할지는 고객사의 결정이다. 파운드리는 철저히 고객사 중심의 비즈니스”라며 “고객사와 관련된 내용은 밝힐 수 없다”라고 답했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