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가 긴 여름이었다. 집집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합쳐져 끊이질 않으니 아파트도 거대한 공장과 같았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아래층 위층에서 뺀 열기까지 합쳐져 금방 집이 열탕이 되었다. 나는 창을 닫고 거실로 나와 할 수 없이 선풍기를 켜고 잤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한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이 여름을 어떻게 견뎠을까. 글쎄, 모두에게 에어컨이 없었다면 이렇게 후덥지근한 날들의 연속도 아니지 않았을까.
지구는 우리의 큰 집이다. 땅과 물은 나를 기른 내 부모요, 내가 돌봐야 할 나의 아이들이다. 어쩌면 한 몸이라고 해도 좋을 나의 본체일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그간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명분에 사로잡혀 생각 없이 지구를 착취하며 산 것 같다.
지난달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민의 숨통이라 할 수 있는 그린벨트를 또 해제해 주택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실련이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동안 서울의 허파에 그린벨트 땅을 훼손해 아파트가 공급됐지만 주변 집값만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얼마 전엔 환경부까지 나서서 기후위기로 인한 극한 홍수와 가뭄에 대비해야 한다며 댐을 14개나 짓겠다고 발표했다. 수몰되어야 할 그곳에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대책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물을 흐르지 못하게 하고 고이게 만드는 댐이 이젠 지독한 녹조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많은데.
14개의 댐,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게 되는 토건사업 아닌가. 이런 정책이 나오기까지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결정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릴케의 ‘가을날’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해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생에 대한 감사로 충만한 릴케의 여름에의 기억은 얼마나 겸손한가. 그러나 지난여름은? 바다가 끓고 강이 끓었다. 강에서,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죽어나갔다. 생명의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되고, 생명의 강이 죽음의 강이 되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여기가 열탕지옥이 아닌가, 생각하게 했던 긴긴 여름은 어쩌면 겸손을 잃어버린 인간의 자업자득인 것 같았다.
시차 때문에 놓치는 위대한 진실이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 뿌릴 때와 거둘 때가 다르기 때문에 놓치는 진실이다. 해수면 온도가 1℃ 올라갈 때마다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감당할 수 없는 폭우가 되어 내리지 않나. 녹조가 번진 죽음의 강, 댐, 하천을 보면서 이제 기후변화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책임은 누가 뭐래도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다는 그 말은 또 얼마나 공허한가. ‘인간’ 뒤에 숨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보다는 도대체 나는 탄소중립을 위해 내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 자문해야 할 것 같다.
에어컨보다는 선풍기를 이용하자. 되도록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말자. 얼마 전 그린피스는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에서 플라스틱 음료 용기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며 사용을 자제하는 문화 조성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까지 했다. 텀블러를 사용하고, 배달음식이 담기는 그 많은 일회용 용기 문제를 잊지 말자.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자. 키니코스학파의 철학이 있다. 필요한 것을 채우기보다는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
그런 작은 행동으로 지구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런 작은 행동들에 익숙해지다 보면 지구를 망치는 거대한 일들, 정책들에 대해서 관심이 생긴다.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이 되어 어떤 일이 지구를 위하는 일인지 경청하게 된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