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하트 낙마시킨 추문도 알고보니 CIA 공작
▲ 1988년 미 대선에서 40대 돌풍을 일으켰던 게리 하트는 언론이 섹스 스캔들 기사를 내보내는 바람에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듀카키스에게 패배했다. 이 스캔들은 나중에 CIA의 공작이었음이 밝혀졌다. |
민주당의 승리를 낙관했던 1988년 미 대선이 부시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부시의 킹메이커들도 레이건의 후광도 아니었다. 민주당 후보를 침몰시켰던 저널의 힘이 있었기에, 공화당은 승리할 수 있었다.
그 비운의 주인공은 민주당의 젊은 피였던 게리 하트였다. 사실 그는 언론의 수혜자였다. 1984년 민주당 경선에 나섰던 그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미국 전역을 돌며 선거 캠페인을 벌이는 40대 후보에 언론은 큰 관심을 가졌고, 급부상한 그는 카터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었던 월터 먼데일과 최종 대결을 펼치는 괴력을 발휘한다. 결국 먼데일이 대선에 나갔지만 레이건에게 참패했고, 공화당은 재선에 성공한 반면 민주당 내에선 쇄신론이 대두했다.
1988년 대선을 앞둔 1987년 민주당 경선은 게리 하트와 마이클 듀카키스의 대결이었다. 물론 게리 하트가 유리한 위치였고 대세로 떠올랐다. 이때 하트의 혼외정사 문제가 루머로 떠돌기 시작했고 하트는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그는 “날 하루 종일 따라다닌다고 해도 난 상관하지 않겠다. 진심이다. 만약 날 미행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소득 없는 지루한 일이 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던 5월 3일 <마이애미헤럴드>는 워싱턴 D.C.에 있는 하트의 연립주택에서 젊은 여성 한 명이 나오는 걸 봤다는 기사를 실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 게리 하트 스캔들의 주인공 도나 라이스. |
사퇴 후 아일랜드로 간 하트는 1987년 12월에 돌아와 “대중에게 선택하도록 하자!”를 슬로건을 걸고 다시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예비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이후 국가안보보장회의 위원이었던 로저 모리스는 하트의 섹스 스캔들이 정보 공작이었다고 밝혔다. 하트는 선거 캠페인 때 미국의 정보기관과 조직 범죄단 사이의 커넥션을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혔는데, 이에 CIA가 개입해 정치 공작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조지 부시는 전 CIA 국장 출신이다.
다음 타깃은 민주당 경선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조 바이든이었다. 그는 듀카키스 다음으로 많은 후원금을 모은 후보였지만 그의 발목을 잡은 건 표절 시비였다. 그의 연설문 중 몇몇 부분이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것을 베꼈다는 것. 그러면서도 인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이것은 부도덕한 짓이라는 게 매스컴의 주장이었다. 과거엔 케네디의 연설을 무단 도용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더불어 대학 시절 다른 사람의 논문을 5페이지 정도 베낀 것과, 학위가 하나밖에 없으면서 세 개라고 한 점과 장학금에 관한 사소한 거짓말이 탄로 났다. 결국 그도 물러났다.
무서운 건 이러한 사실을 언론에 흘린 장본인이 같은 당 경쟁자인 마이클 듀카키스였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당내 경쟁자를 제쳤다고 해서 듀카키스가 안전한 건 아니었다. 사실 처음엔 낙관할 만했다. 부시와의 경쟁에서 70퍼센트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렇게만 간다면 그는 대통령이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작은 틈새를 노려 반격에 나섰다. 과거 듀카키스는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는데, 이 시기 매사추세츠에선 교도소의 모범수들에게 며칠의 휴가를 허락했다. 그때 윌리 호턴이라는 강간범이 외출 기간에 또 강간 범죄를 저질렀고 자신의 약혼자까지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강도 행각을 벌이다 한 소년을 19번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공화당은 이 사건을 당시 주지사였던 듀카키스와 연결시켰고,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듀카키스를 겨냥해 부시는 TV토론에서 “당신의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하는 범죄자의 사형에도 반대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듀카키스는 “그럼에도 난 사형에 반대한다”고 말했고, 그의 지지율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공화당은 듀카키스를 무고한 시민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자를 방조하는 무능한 정치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신 일급 범죄자에 대한 사형 제도를 지지하는 부시는 강력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민주당만이 공화당의 타깃이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조지 부시는 공화당 안의 적들을 제거하는 데 더 공을 들였고, 1988년 대선은 미국 정치사에서 음모와 협잡과 흑색선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다음 호에 계속)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