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극 배후엔 ‘최고 대장’ A 검사가…”
박정희 정권 당시 스캔들 메이커였던 정인숙 씨의 유일한 혈육인 정성일 씨.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정 씨는 자신이 연루된 H 골프장 사장 납치 사건의 감춰진 진실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
정인숙 씨의 유일한 혈육인 정성일 씨 또한 어머니 못지 않은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다. 정 씨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뒤 사업가로 변신해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2007년 2월에 발생한 H 골프장 납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3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했지만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특히 골프장 사건의 핵심 주역이었던 정 씨는 2007년 골프장 사건은 납치극이 아니라 자작극이었다고 폭로해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말기암 환자로 죽음을 앞둔 정 씨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폭로한 납치극 사건의 전말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일요신문>은 지난호에 이어 정 씨가 납치극에 휘말린 진짜 이유와 수사기관 조사 및 재판 과정에서 거짓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을 녹취록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공개한다.
진단서.
정 씨는 이미 골프장 사건과 관련해 자신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녹취록 3권을 만들어 논 상태다. 정 씨가 기록한 녹취록 내용이 모두 사실인지 여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특히 이 사건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났기 때문에 법적인 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납치극을 주도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까지 마친 핵심 당사자 3명(부장검사 출신 김 아무개 변호사, 골프장 사장의 외삼촌 윤 아무개 씨, 정성일) 중 두 사람(윤 씨와 정 씨)이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적인 논란을 떠나 사건의 실체를 둘러싼 진실게임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녹취록은 모두 3권으로 지난해 10월과 12월, 올 11월에 작성됐고 공증까지 마친 상태다. 정 씨는 서문을 통해 “대장암 말기 환자로서 간과 폐까지 암이 전이되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 저는 그 간의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2007년 2월 26일 저녁 7시 40분 경에 발생한 납치극에 대한 사건의 진실을 정직하게 진술해 억울한 누명을 쓴 윤 씨에게 속죄하려는 마음에서 그 동안 있었던 사실을 진술한다”고 녹취록 작성 배경을 설명했다.
녹취록에는 정 씨와 또 다른 공범이었던 김 아무개 변호사와의 인연 및 친분관계가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녹취록에 따르면 정 씨는 미국에 있을 때 친구 소개로 1990년경 B 씨를 알게 돼 가깝게 지냈다. 이후 한국에 귀국해서도 B 씨와 자주 만나 술자리도 같이하며 ‘형’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2006년 4월경 B 씨의 소개로 검사 출신인 김 변호사를 알게 됐다.
이후 정 씨는 나이가 비슷한 김 변호사와 거의 매일 만나 의기투합하는 등 친구로 지냈다. 주식 투자로 큰돈을 잃은 김 변호사는 검사 월급으로는 30억 정도 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 2006년 2월에 검사 옷을 벗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 당시 정 씨는 김 변호사를 위로해 주려고 강남 소재 유명 룸살롱에서 자주 술을 먹었다.
정 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오래 생활해 한국에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김 변호사는 나의 첫 친구이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많이 의지하고 정을 줬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정 씨가 골프장 사건에 연루된 사연은 무엇일까. 녹취록에 따르면 빚에 쪼들려 있던 김 변호사는 정 씨에게 수차례에 걸쳐 “‘마지막 비즈니스가 있다’며 일이 시작되면 알려주겠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러던 중 2007년 2월 초순경 김 변호사는 “정 사장 우리 한번 잘해 보자. 정 사장은 내 비즈니스에 꼭 필요하니 일이 성사되면 100개는 줄 수 있어”라고 사업 참여를 제안했다. 정 씨가 “100억을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김 변호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시했는데 그날 저녁 김 변호사는 비즈니스 내용을 상세하게 들려줬다.
김 변호사는 “H 골프장 부자지간 싸움인데 강 아무개 사장이 골프장을 통째로 먹으려고 한다. 강 사장은 내가 검사 시절 50억 횡령사건으로 알게 됐는데 도와달라고 한다. 내가 강 사장에게 300억 원을 받기로 하고 일을 맡았다. 정 사장한테 100개 줄게. 정 사장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는 정 씨에게 일본인 3명 정도의 인감증명 및 주민등록표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정 씨는 구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정 씨가 이런 것이 왜 필요하냐고 묻자 김 변호사는 ‘쇼’하기 위해서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정성일 씨가 취재진에게 보여준 세 권의 녹취록.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깜짝 놀랄 만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추후 TV에서 ‘강 사장 납치’라고 보도된 것을 보고 정 씨가 어리둥절하자 김 변호사는 “윗선에 얘기 다 해 놓았다. 신경쓸 것 없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2월 28일 저녁 자신의 측근이자 또 다른 공범인 K 씨에게 300만 원을 주고 항공편까지 예약해주면서 서둘러 해외로 피해 있으라고 지시했다.
2007년 3월 초 경찰에 구속되어 갔더니 K 씨를 제외한 동조자들이 다 함께 있었다. 그때 김 변호사는 정 씨에게 “정 사장,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납치는 윤 씨가 시켜서 했다고 해라”며 조금만 고생하자고 말했다. 이에 정 씨는 김 변호사를 진실로 믿었기에 그가 시키는 대로 진술했다. 이렇게 해서 정 씨는 골프장 납치사건의 핵심 주역으로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정 씨가 아무리 김 변호사를 믿고 신뢰했다하더라도 수사기관의 조사 과정에서 계속해서 거짓 진술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녹취록에는 정 씨가 거짓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녹취록에 따르면 정 씨와 김 변호사를 연결시켜준 B 씨의 친형은 검찰 최고위급에 재직 중인 A 씨였다. 정 씨와 김 변호사, 그리고 B 씨 등은 납치사건 감금장소인 평창 펜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A 씨 소유 별장에서 자주 어울렸다. B 씨가 정 씨에게 김 변호사를 처음 연결시켜줄 당시에도 그를 A 씨 라인이라고 소개했다.
납치극에 연루돼 구속되자 김 변호사는 정 씨에게 “무조건 ‘예 예’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절대 억울하단 말은 하지 마라. 검찰은 그 말을 제일 싫어한다. 그리고 무조건 윤 씨를 수괴로 몰아가라. 그래야 넌 나갈 수 있다. 모든 건 최고 대장인 A 씨가 계시니 믿어라”라고 압박했다. 정 씨는 친형제처럼 믿고 의지했던 김 변호사를 철석같이 믿고 그가 시키는 대로 진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재판 과정에서도 정 씨는 자신의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했고, 법정에서 김 변호사가 시켜서 했다고 진술했는데도 법원은 김 변호사와 작당해 꾸민 납치극 주범으로 사건의 진위를 둔갑했다. 정 씨는 법원 판결에 따라 청송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정 씨는 출소 후 김 변호사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고 집안은 엉망이 됐다. 이런 와중에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해 1월경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본 결과 대장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암은 간과 폐에도 전이돼 죽어가는 시한부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정 씨가 기록한 녹취록의 내용은 모두 사실일까. 현재 골프장 납치사건은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법적인 문제는 마무리된 상태다. 하지만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존재한다. 여기에 법원 판결로 옥고까지 치른 공범 3명 중 두 사람이 당시 사건은 왜곡됐다며 억울함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 특히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정 씨는 마지막 소원으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H 골프장 측은 윤 씨나 정 씨의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입장이다. 11월 29일 기자와 통화한 골프장 측 관계자는 “이미 대법원 판결로 마무리된 사건을 왜 자꾸 묻는지 모르겠다”며 “당사자가 아니라 대답할 입장도 아니지만 당시 사건의 진실은 고등법원 판결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하라”며 불괘한 반응을 보였다.
‘정성일 씨가 당시 사건이 왜곡됐다고 기록한 녹취록을 본 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정성일이 누군지도 잘 알지도 못한다.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까지 갔다온 사람이 억울하다고 입장을 번복하면 다 믿어야 되냐. 녹취록을 본 적도, 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과연 사법적 판단을 떠나 납치 사건의 진상은 바뀔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둔 당사자의 증언으로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다시금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