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치료제 사재기 왜 하나 했더니…
▲ 프로포폴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스틸녹스 등 불면증 치료제가 제2의 포폴로 떠오르고 있다. |
최근 한 유명 여가수가 자신의 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당시 그는 항우울증약 ‘리보트릴’ 20알을 복용한 상태였다. 이를 두고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의혹에 대해 해당 가수 측은 “평소엔 한두 알씩 먹었는데 이날은 술에 취해 여러 알을 먹었을 뿐”이라고 급히 해명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오른 항우울제 ‘리보트릴’을 두고 의료계 내에선 말이 많았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박 아무개 씨(44)는 “쉬쉬했던 일이 터진 기분이다. 리보트릴이 안전한 약이긴 하지만 자살이나 환각 등에 악용될 가능성이 드러나게 돼 앞으로가 염려스럽다”고 진단했다.
리보트릴은 항우울제로 주로 간질 및 부분발작에 한해 처방되고 있지만 수면효과도 탁월해 비보험 형식으로 불면증 치료에 더 널리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처방받는 과정도 포폴에 비해선 ‘누워서 떡먹기’ 수준이다. 정신과, 내과 등을 방문해 ‘잠이 안 오니 리보트릴을 처방해 달라’고 말하면 최대 한 달치 분량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다. 환자가 처방받은 리보트릴 30알을 한 번에 복용하는 위험한 짓을 해도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
전문의의 소견에 따라 적정량의 리보트릴을 복용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중독되면 심각한 환각 및 치매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60대 남성 환자 이 아무개 씨는 6개월간 리보트릴을 복용해오다가 위장이 약해져 잠시 중단한 사이 ‘죽은 부인이 살아 돌아왔다’며 치매 증세를 보이거나 몸을 떨며 환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박 전문의는 “리보트릴도 향정신성 의약품(마약)이기 때문에 갑자기 끊으면 금단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하지만 리보트릴은 그나마 안전한 축에 속한다. 정말 우려되는 약물은 스틸녹스, 졸피뎀, 할시온 같은 기타 수면제들이다”라고 했다.
최근 졸피뎀을 이용한 성범죄 및 살인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일부 정신과 전문의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정신과 전문의 이 아무개 씨(41)는 “졸피뎀은 최대 28일, 할시온은 최대 21일 치만 한 번에 처방 가능한데 이마저도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를테면 21일치 할시온을 받아가면서 ‘장기간 해외출장을 나가니 한 달치만 더 달라’고 요청하는 환자들이 부쩍 늘었다. 마땅히 거절할 방도가 없어 요구대로 처방을 해주게 되는데 뉴스에서 할시온, 졸피뎀 등의 남용으로 인해 문제가 불거지면 괜한 자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의 권 아무개 씨(50)는 “어떤 환자는 가족 주민등록번호를 총동원해서 할시온 80여 알을 타간 적이 있다. 음료수 한 박스를 들이밀고 ‘불면증이 심한데 해외연수를 간다’며 처방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통에 주긴 줬는데 기분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 타간 환자들이 2개월 내에 다시 병원에 방문한 것을 보고, 속았구나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시온과 같은 수면제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진 원인은 무엇일까. 할시온, 졸피뎀, 스틸녹스 등 수면유도제를 먹으면 10~15분 내 깊은 수면에 빠지고 잠든 사이 기억이 완전히 끊긴다고 한다. 더군다나 값도 싸다. 수면제 10알 처방받는데 지불해야하는 약값은 1700원, 조제료 6330원. 포폴에 비하면 거저 얻는 수준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 때문에 악용해 대량의 수면유도제들이 주로 유흥업소 등지로 흘러들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 6월 한 여성이 나이트클럽에서 졸피뎀을 탄 커피를 마신 후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최근 전국을 깜짝 놀라게 했던 ‘입양아들 내연남’ 살인 사건에서 이용된 약물도 ‘졸피뎀’이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 약물에 대한 유흥업소 측 반응은 어떨까. 유흥업소 관계자 김 아무개 씨(45)는 ‘스틸녹스’, ‘졸피뎀’이란 말을 꺼내자 ‘스틸녹스 장사하는 사람을 아느냐, 우리 애들이 찾는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
김 씨는 “요즘 뜨는 약물이 ‘스틸녹스’와 ‘할시온’이다. ‘졸피뎀’은 최근 뉴스에 부쩍 자주 등장해 식약청 감시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져서 유흥업소 측에선 조심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에 따르면 강남 일대 유흥업소 관계자들(업주, 아가씨 등)이 정신과, 내과 등을 방문해 스틸녹스를 타가는 게 ‘낮일’로 불릴 수준으로 열성적이다. 텐프로 종사자 송 아무개 씨(28)는 “포폴 사건 때는 주사를 맞다 죽을까봐 무서워서 못 맞았다. 하지만 스틸녹스 한 알에 양주 반 잔이면 6시간 정도 안전하게 푹 잘 수 있다. 문제는 중독성이 있어서 이거(스틸녹스) 없이는 잠을 못 잔다. 그래서 어제는 업소 오빠에게 부탁해 구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유흥업소 관계자 김 씨는 “소규모 업소에서는 스틸녹스를 술에 타서 손님에게 먹인 후 바가지를 씌우는 수법을 아직도 쓰고 있다”며 “지역 병원을 돌아다니며 대량의 스틸녹스 등을 처방받아 이걸 손님이나 아가씨들에게 비싸게 파는 약품상까지 등장했다. 사법당국은 왜 이런 애들을 못 잡아내는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 권 아무개 씨는 “실제로 이런 수법으로 ‘한 환자가 병원을 돌아다니며 1년에 스틸녹스 3600알을 처방받았다’며 서울시 측으로부터 전문의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문서가 내려온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유흥업계에서 히트를 치면 곧바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행처럼 번진다는 말이 있다. 포폴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최근 대세로 떠오른 ‘스틸녹스’, ‘할시온’ 등은 포폴보다는 위험성이 낮고 중독성 또한 약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업계 전문의들의 시선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전문의는 “스틸녹스의 경우 최근 들어 ‘자살용 드럭(drug)’으로도 악용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지난 2월 울산에서 익사한 한 여성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해당자의 위에서 대량의 스틸녹스가 발견됐다고 한다. 경찰 조사에서 이 여성은 수원 지역 정신과 병원에서 본인과 이혼한 남편의 주민번호로 스틸녹스 60여 알을 처방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의들은 “식약청이 포폴이나 미다졸람 잡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데 기타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관리에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