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감독과 밀당 후 결심 굳혔다
▲ 박찬호 포에버 박찬호가 11월 30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은퇴의사를 밝히고 야구선수로서 살아온 시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 “은퇴가 확실하다”
올 시즌이 끝났을 때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박찬호가 ‘11월 미국에 다녀오고서 지인들과 만나 앞으로 진로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며 “11월이 지나기 전, 현역 지속이든 은퇴든 가부간 결정이 날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한화 분위기는 박찬호의 최종 거취를 ‘은퇴’로 보는 듯했다. 모 선수는 “(박)찬호 형이 김응용 감독님 취임식(10월 15일) 때 양복을 입고 찾아와 ‘아, 감독님 취임을 축하해주러 왔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감독님과 간단히 면담하고, 라커룸의 옷과 스파이크, 글러브 등 용품일체를 정리해 조용히 사라지는 걸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며 “구장을 떠나면서 후배들에게 ‘고생해라, 팀을 위해 계속 힘써 달라’고 당부하는 걸 보고 ‘아, 이제 은퇴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구단 관계자도 “박찬호가 이미 은퇴를 결심했는지 프런트 사람들을 보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며 “구장문을 나서며 못내 아쉬운 듯 대전구장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찬호의 지인 역시 “현역으로 계속 뛰려고 마음먹었다면 찬호 성격상 일찍 그런 의사를 밝혔을 것”이라며 “가족의 은퇴 권유와 ‘명예롭게 은퇴하라’는 주변 조언을 듣고 11월 중순쯤 은퇴를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은퇴 여부를 밝히기로 약속한 11월이 다 지나도록 박찬호는 입을 다물었다. 장고를 거듭한다는 뜻이었다. 그즈음 박찬호의 정신적 멘토인 모 야구인은 “찬호가 내년 시즌까지 현역으로 뛰고 싶어 한다”고 알렸다.
“올 시즌 상반기 성적만 보면 찬호는 성공작이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난타를 당했다. 언론에선 ‘선발로 뛰기엔 고령이라, 체력적 부담이 심한 것 같다’며 부진의 이유를 설명했지만, 실은 몸이 좋지 않았다. 찬호도 그 때문에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미국에서 개인훈련을 하며 ‘몸이 좋아졌다. 지금 몸 상태라면 내년 시즌엔 더 잘 던질 수 있을 것같다’고 했다. 원체 야구를 사랑하는 친구라, 1년 더 마운드 위에 설 것이라 생각했다.”
박찬호의 후배 투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찬호 형이 미국에 있을 때 팀 동료들에게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내년 시즌 더 잘해보자’는 문자도 있었다. 특히나 찬호 형은 (류)현진이가 떠나면서 팀 마운드가 약해질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평소 찬호 형이라면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팀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할 분이었다. 속으로 ‘1년 더 찬호 형의 노하우를 배우겠구나’ 싶어 기뻤다.”
# 김응용 역정 낸 까닭
박찬호가 은퇴 전까지 현역 지속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한 건 확실하다. 박찬호는 11월 마지막 주까지도 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속내를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결국 박찬호는 은퇴로 최종 거취를 결정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찬호의 지인은 “체력적인 문제, 고령 등은 은퇴 이유가 되지 못한다”며 “은퇴의 실질적 배경은 보직 문제였다”고 밝혔다.
“찬호는 5일에 한 번씩 등판하는 선발투수를 원했다. 원래 몸 푸는 시간이 다른 투수보다 긴 데다 매일 등판해야 하는 불펜투수보단 체력적으로 선발이 낫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찬호는 팬들의 뇌리에 선발투수로 기억되길 원했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이 면담자리에서 불펜 전환을 요청하며 고민이 깊어졌다. 이후로도 김 감독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누차 ‘박찬호를 불펜투수로 쓰겠다’고 밝히며 찬호가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약 한화 코칭스태프가 찬호에게 선발을 약속했다면 은퇴를 다음으로 미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김 감독은 “박찬호는 선발보단 불펜에서 뛰는 게 팀을 위해 좋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선수가 원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타협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보직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갈등이 코칭스태프와의 불편한 관계로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박찬호가 11월 중순이 지나도록 은퇴 여부를 밝히지 않자 김 감독은 “이런 경우는 없다. 선수가 빨리 입장을 밝혀야 구단이 내년 시즌 준비를 하지 않겠느냐”며 역정을 냈다.
미국에 있던 박찬호도 이 소식을 듣고 난감해했다는 후문이다. 박찬호는 은퇴식에서 한대화 전 감독에 감사를 나타냈으나, 현 코칭스태프와 관련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 감독의 역정은 팀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선 당연했다. 한화는 11월 12일까지 NC에 보호선수 20명 명단을 제출해야 했다. NC의 ‘보호선수 외 1명 특별지명’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한화는 박찬호의 현역 지속을 전제로 그를 보호선수 명단에 포함했고, 그 바람에 송신영이 명단에서 제외됐다. NC는 곧바로 수준급 불펜요원 송신영을 낚아챘다. 내년도 재계약 대상 선수를 분류하는 ‘보류선수 명단’ 작성 때도 한화는 박찬호를 포함시켰다. 대신 젊은 선수들을 방출했다.
결과적으로 박찬호가 은퇴했으니, 한화는 박찬호를 떠나보내고, 송신영도 빼앗기고, 젊은 선수도 잃은 셈이 됐다. 어쩌면 김 감독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역시 위로를 받아야 할 상대일지 모른다.
구단의 처신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단은 김 감독과 박찬호의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하지만, 전혀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모 야구인은 “김 감독이 역정을 낸 것도 박찬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박찬호의 은퇴 결정을 발 빠르게 체크하지 못한 구단을 향한 것”이라며 “김 감독이 박찬호 은퇴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래서 한화가 꼴찌구단’이라며 분노를 터트렸다”고 귀띔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