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타자로 출전해 2볼넷 2득점 기록…“뒤에 좋은 타자들 대기해 출루 집중”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부터 시작되는 개막전에 앞서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 앞에서는 ‘오프닝 세리머니’를 겸한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신시내티 레즈를 상징하는 빨간색 유니폼과 티셔츠를 입은 팬들이 경기장으로 모여들었고, 관중석 의자까지 빨간색이라 이날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 전체가 레드 물결로 장관을 이뤘다.
개막전 행사가 열리고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이 멜빈 감독 다음에 타순대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신시내티 레즈 선수들 중 가장 큰 환호성을 받은 이는 바로 엘리 데 라 크루즈다. 이날 3번 타자로 나선 데 라 크루즈의 뒤를 이은 4번 타자는 김혜성의 다저스 입단 이후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된 개빈 럭스다.
신시내티의 선발 투수인 파이어볼러 헌터 그린은 1회초부터 100마일(161km/h)의 강속구를 꽂아 넣으며 샌프란시스코 타선을 얼어붙게 했다.
1회 2아웃 상황에서 첫 번째 타석에서 들어선 이정후는 1구를 지켜본 다음 2구는 파울로 걷어냈지만 3구 바깥쪽 99.9마일(160.7km/h)의 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팀이 0-3으로 끌려가던 4회초 1사 후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이정후는 1구 98.3마일(158.1km/h)의 빠른 볼이 스트라이크가 되자 이후 볼 4개를 침착하게 골라내면서 출루한다. 4번 타자 맷 채프먼이 소득 없이 물러나는 등 샌프란시스코 타선이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엘리엇 라모스가 무려 11구 승부 끝에 헌터 그린의 98.7마일(158.8km/h)의 패스트볼을 공략했고, 이 공은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된다. 이정후, 라모스가 홈 베이스를 밟고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격한 축하 세리머니를 펼쳤다.
6회초 1사 주자 없는 가운데 타석에 들어선 이정후는 바뀐 투수 스콧 바로우를 맞이해 풀카운트 승부를 벌였으나 6구째 81.9마일(131.8km/h)의 스위퍼에 헛스윙 삼진을 당한다. 그리고 8회말까지 2-3으로 끌려가던 샌프란시스코는 9회초 대역전극을 벌인다. 9회 빅이닝의 문을 연 선수는 이정후. 이정후는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신시내티의 이안 지보를 상대로 0-2 불리한 카운트임에도 ‘눈 야구’를 펼치며 풀카운트 승부를 벌였고, 8구 83.1마일(133.7km/h)의 스위퍼를 참아내며 볼넷을 얻어 출루한다.
다음 타자는 샌프란시스코의 4번타자 맷 채프먼. 맷 채프먼은 2구째 93.7마일(150.7km/h)의 포심 패스트볼을 우전 안타로 만들었고, 이때 이정후는 3루까지 내달렸다. 엘리엇 라모스가 삼진으로 물러난 후 패트릭 베일리의 타구가 2루수 글러브를 살짝 벗어나면서 이정후는 홈을 밟았고, 샌프란시코는 3-3 동점을 이룬다.
그다음 타자는 윌머 플로레스. 플로레스는 앞선 세 타석에서 삼진 포함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타석 1-2 카운트에서 4구째 84.9마일(136.6km/h)의 스위퍼에 방망이를 휘둘렀고, 이 공은 좌측 담장을 넘기는 스리 런 홈런이 된다. 순간 신시내티 더그아웃은 침묵이 흘렀고, 샌프란시스코 더그아웃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이정후는 안타 없이 볼넷으로 출루할 때마다 득점을 만들어내며 짜릿한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기 후 취재진을 만난 샌프란시스코의 밥 멜빈 감독은 이정후의 볼넷 2개를 크게 칭찬했다.
“이정후는 (어깨 부상과 수술로)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 그런 선수가 복귀하면 볼넷보다는 적극적으로 스윙하고 싶을 텐데 오늘 2개의 볼넷은 정말 중요했다. 이정후가 3번 타자로서 공을 치고 싶은 마음이 컸을 텐데 인내심을 갖고 참아냈다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때로는 안타보다 볼넷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오늘 그런 날이었고, 이정후가 그걸 두 번이나 보여줬다.”
경기 후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이정후는 신시내티의 선발 투수 헌터 그린을 향해 “정말 좋은 투수”라고 높게 평가했다.
“상대 팀 선발 투수가 아주 좋은 공을 던졌고, 우리가 찬스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엘리엇 라모스의 홈런으로 점수 차를 좁혀가다 9회 역전승을 거뒀다. 삼진 먹고 나서 공을 따라가 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내 (스트라이크) 존을 지켜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접근법이 2개의 볼넷을 만들어냈다.”
이정후는 오랜만의 정규시즌 복귀전이라서 조금이라도 빨리 첫 안타가 나오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선수가 타석에서 공을 참아낸다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복귀전이고, 안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9회 때는 윌리 아다메스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내 뒤에 맷 채프먼, 엘리엇 라모스 등 좋은 타자들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출루만 한다면 좋은 상황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통했던 것 같다.”
이날 신시내티 팬들은 엄청난 박수와 함성으로 레즈 선수들을 응원했다. 이정후는 그 응원 소리가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을 향한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그라운드에서 큰 함성을 듣다 보니 즐겁고 재미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에 이정후는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진행된 경기를 지켜보고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 많은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미국 신시내티=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