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조선 제철 거느린 ‘정씨’들이 부러워
▲ 반도체사업 실적 부진으로 황창규 사장(사진)이 문책성 인사를 당했다. 반도체를 대체할 신수종 사업에 대한 삼성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
삼성전자 주변에선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직원들을 임시 조직에 발령 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직접적인 명예퇴직 강요는 아니지만 발령 당사자들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주식과 관련한 소문도 내부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지난 상반기 삼성전자 주가가 52주 연속 신저가를 경신할 때 업계 쪽에선 ‘삼성전자 직원들이 보유하고 있던 자사 지분을 먼저 팔아치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지난해 한때 70만 원을 훌쩍 뛰어넘던 삼성전자 주가는 올 4월 초부터 3개월간 50만 원대에서 허우적거렸다. 올 초부터 삼성전자가 주가 안정을 위해 자사주 대량 매집에 나섰음에도 정작 직원들은 주식을 처분하는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사상 초유의 증시 활황마저 삼성전자를 비켜갔던 셈이다.
강도 높은 경영진단과 문책성 인사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룹 내에서도 신수종 사업 모델을 찾아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문제는 그룹의 주력인 반도체부문을 대체할 만한 마땅한 사업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도체 특수를 톡톡히 누려왔지만 이를 대체할 첨단 산업이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대형 제조업 시장, 이른바 굴뚝산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룹 안팎에선 “이러다 자동차 사업이라도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로 인해 삼성이 입었던 상처를 감안하면 그룹 차원에서 이를 공론화시키는 것이 간단치 않을 것이다. 삼성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조선업을 신수종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대중공업 같은 선발업체들과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부담이 따른다. 일각에선 삼성이 노릴 수 있는 신수종사업으로 제철업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렇다 보니 삼성그룹 내에선 자동차 조선 제철 등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범 현대가에 대한 부러움의 눈길마저 감지된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신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하기 위해선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기존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재벌들의 이해와 정부기관의 각종 규제 등이 후발주자에게 큰 장애물인데 정부의 물밑 협조 없이 이를 극복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공격적 M&A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권력과의 교감은 필수란 지적이다. 최근 일부 재벌들이 대형 M&A를 성사시키고 나서 무성한 뒷말을 남긴 것이나 M&A를 통해 몇 년 사이 규모를 늘린 기업들이 검찰과 공정위의 내사를 받고 있다는 점 또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삼성 안팎에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에 대한 아쉬움이 쉽사리 떠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4대 재벌 총수의 청와대 회동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2014년 동계올림픽과 2012년 세계박람회 유치를 당부하고 협조를 구한 바 있다. 국내 여러 재벌들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에 공을 들였지만 IOC 위원인 이건희 회장의 활동반경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러나 유치 실패 이후 정부와 삼성의 관계가 평창 유치전 이전만도 못하게 될 경우의 수마저 거론되고 있다. 평창이 개최지 선정 1차 투표에서 1등을 하고도 결선에서 역전패당하는 과정에서 정부 인사들과 삼성 인사들 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어쨌든 평창 유치 실패로 삼성이 정부와의 관계를 대폭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임에는 분명한 셈이다.
삼성이 대형 M&A를 추진할 경우 삼성 지배구조를 비판해온 정치권과 시민단체 인사들이 어떤 행보를 취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지분율이 1.86%에 불과함에도 삼성에버랜드를 축으로 하는 순환출자구조 덕분에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 총수일가가 핵심 계열사 지분을 더 이상 사들이지 않고 순환출자구조에 의존하는 것은 ‘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 1%를 확보하는데 9000억 원 정도의 거금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올 하반기 최대매물로 여겨지는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시가총액이 12조 원에 달한다. 만약 삼성그룹이 대우조선 인수전에 달려든다면 적어도 수조 원 지출은 감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삼성 지배구조 비판론자들이 “그럴 돈 있으면 지배구조나 개선하라”고 걸고넘어질 경우를 상정해 볼 수도 있다. 인수합병을 하든 신수종 사업을 벌이든 먼저 삼성 내부의 지배구조 문제부터 해결해야할 처지인 것이다. 금융그룹과 전자그룹의 지배구조 확정과 금산분리 규정의 완화 등 삼성이 정부 눈치를 봐야 할 게 수두룩하다. 대형 M&A에 나설 실탄이 마련됐다 하더라도 오너의 낮은 지분과 순환지배구조를 정리하지 않는 한 인수합병전에 나서기도 쉽지 않은 형편인 것이다. 삼성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