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나이 들고 나니 세네카의 문장이 그대로 스며든다. 인생을 잘 살려면 죽음을 배워야 하고, 죽음을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는 세네카의 고백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니 저 문장이 ‘함부로 인생을 안다고 하지 말라’는 살아있는 경고 같다. 아마 세네카는 죽어가면서까지 인생을 배우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를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서 부와 권력을 누렸던 특이한 스토아 철학자라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또 네로와의 인연 때문에 죽어야 했던 불운한 인생이기도 했으니.
늘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살았던 세네카는 죽음을 훈련해야 한다고 믿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죽음은 알려준다. 살아서 누렸던 행복이나, 살아서 고단했던 고통 모두가 아침이슬처럼,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무상한 것임을. 세네카는 생의 덧없음을 받아들여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준비가 된 인생이야말로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세네카는 연설의 대가였다. 그의 말에는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고, 별 배경이 없는 그를 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게 한 것도 바로 그 능력이었단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나. 그를 유명하게 했던 그 능력은 그 유명한 황제 칼리굴라를 자극했다. 질투가 심한 황제는 자기보다 더 연설을 잘하는 세네카를 아예 쫓아내 버린다.
그가 복권된 것은 칼리굴라가 죽고 나서였다. 세네카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추방과 유배라면, 그가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인 아파테이아(평정심)를 유지해야 했던 곳은 그렇게 피바람 몰아치는 세상이었다.
살다보면, 세네카에게 칼리굴라처럼, 버거운 사태를 만난다. 삶이, 사람이, 건강이 버거워 사람을, 삶을 벽으로 느낄 때 그 벽이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일깨우는 다리가 되게 하는 능력은 침착함이다. 침착함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늘 깨지고 흔들린다. 흔들려보지 않은 평정심이 어디 있으랴. 상처 입고 흔들릴 때마다 길러야 하는 능력은 조급해진 마음, 절망한 마음을 고요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그 힘이다.
어제와는 다른, 낯설고 공포스러운 사태가 바람처럼 다가와 내 생의 촛불을 끄려할 때 겪게 되는 고통을 그리스인들은 아고니아(Agonia)라고 했다. 예기치 않았던 무엇인가가 ‘나’를 위협해오는 처절한 상황을 겪어낼 때 눈 감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기꺼이 겪어내는 사람이 생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가 겪어왔던 고통스런 나날들을 소화해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 같다.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가난과, 꿈꾸기 힘든 젊은 날들, 장애를 겪고 살아내야 하는 시간들이 이제 그의 자산이 되고 있음을 본다. 아고니아는 그렇듯 부끄러운 시간이거나 외면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만드는 시간일 수 있겠다.
살다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나’의 아고니아, 내가 ‘나’를 집어삼키는 고통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나를 단련시킨 용광로였다는 것! ‘나’를 집어삼키는 것이라 두려워했던 그것이 바로 ‘나’를 성장시킨 성장점이요, 반면교사였음을 알게 되기까지 비슷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나’를 찾아들었음을.
아고니아는 고유하다. 비교가 되지 않고,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아고니아가 나의 아고니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고니아를 거치며 우리는 자신의 삶의 고유성을 어렴풋 감지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작아지기도 하고, 주눅이 들기도 하고, 박탈감도, 저항감도 생겼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나’를 고유하게 만든 운명의 손길이었음을 고백하게 됐던 당신의 아고니아는 어떤 형태로 당신을 찾아왔나.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