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이 닦은 길로 새차 타고 코스닥행?
▲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이 육로를 통한 남북 교역사업을 시작해 독점권을 지닌 현대아산과의 갈등이 예상되고 있다. | ||
지난 19일 오후 도라산 남북출입국 사무소. 장맛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경의선 연결도로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북한 쪽에서 짐을 가득 실은 여러 대의 트럭이 남한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다.
이날 경의선 육로를 통해 들어온 트럭에는 북한 각지에서 생산된 고사리와 두릅나물, 칡냉면, 메밀냉면 등이 실려 있었다. 이어 낯익은 얼굴의 한 남자가 11t트럭과 5t트럭 3대씩에 실린 화물들을 점검하며 미소를 지었다.
북한에서 이 물건들을 들여온 남자는 다름 아닌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그는 이 화물을 경의선 연결도로를 이용해 직접 국내로 들여왔다.
지난달 21일 북한산 양식 철갑상어를 육로를 통해 시범 반입한 데 이은 두 번째 직교역이었다. 그동안 남북 간 교역물자는 중국 등 제3국을 이용하거나 선박을 통해 국내에 들여왔고, 육로를 이용한 물자 반입은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지구에서 생산된 제품에 한정됐다.
그런데 김 전 부회장은 자신이 설립한 ‘아천글로벌코퍼레이션(아천)’이라는 회사를 통해 북한에서 곧바로 물건을 싣고 들어온 것이다.
그나마 이날 가져온 물량은 그가 품고 있는 ‘원대한’ 계획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한 수준이다. 김 부회장은 앞으로 개성과 강원도 고성에 대규모 농수산물 유통센터를 설립하고, 북한의 강원도 통천 앞바다에서 채취한 모래도 선박을 이용해 부산항으로 들여올 계획이다.
김 부회장은 이미 북한 강원도 통천에 모래 운반선을 보냈다. 국내업체들이 북한의 모래를 채취해 반입하고 있는 서해지역을 피하면서도, 남쪽과 달리 동해안 지역에 풍부한 모래 자원을 국내로 반입해 자재난을 겪고 있는 국내 업체에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또 아천은 북한의 건설 기능인력을 양성해 제3국 건설시장에 송출하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인력을 훈련시켜 해외에 보내 외화벌이를 할 뿐 아니라 경제개발에 필요한 양질의 산업인력을 확보할 수 있고, 아천 측은 값싼 북한 노동력을 수출해 중개수수료를 벌어들일 수 있다.
이외에도 김 부회장은 국내 중견건설업체를 인수해 북측과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개성시내 중심부에 400평 규모의 상업용지를 분양받아 업무용 빌딩을 건설한 뒤 애니메이션, 그래픽 사업도 벌인다는 청사진을 마련해 놓고 있다.
또 향후 러시아에 풍부하게 매장된 기름과 천연가스를 북한을 거쳐 국내로 들여오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 전 부회장은 “이번 육로교역을 시발로 남북간 유통체계를 확립해 세계시장 진출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점은 김 전 부회장이 이런 대북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정주영 현대 창업주와의 연계고리를 강조하고 나선 점이다. 그는 육로교역 사업을 시작하면서 경기도 하남시의 정 회장 묘소에 참배하는 의식을 갖는 등 나름대로 대북사업 정통성을 안팎에 주장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현대아산 쪽에서는 이런 그의 행보에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업계 일각에선 향후 아천이 북한 쪽의 ‘꽃놀이패’로 활용되며 현대아산의 독점적 지위를 압박할 경우 또다른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떠들썩한 ‘귀환식’과 맞물려 국내 증권시장에는 김 전 부회장과 관련해 흥미로운 소문이 퍼지면서 한 코스닥 기업이 연일 상한가 행진을 벌여 주목을 끌고 있다.
현재 증권가에는 김 전 부회장이 코스닥 기업 위디츠의 유상증자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진 상태다.
위디츠는 반도체 장비업체로 지난 6월 28일 차입금 상환을 위해 220억 원대의 유상증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증자는 제3자 배정방식으로 진행되며, 475만여 주가 신규발행될 예정이다. 신주발행가액은 4640원이다. 증자물량은 이홍기 동양토탈 상무, 배정윤 싸이더스 경영지원본부장에게 각각 107만 주씩 배정됐다.
현재까지 증자 대상자 명단에 김 전 부회장의 이름은 나와있지 않다. 그런데도 업계에서는 김 전 부회장이 증자대상자로 추가되거나 여타 주주들의 증자물량을 대신 받아가는 방식으로 결국 이번 증자에 참가할 것이란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계 한 관계자는 “김 전 부회장이 위디츠 증자에 참여해 100만 주가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만 개인자금으로 참여할지, 그가 최근 설립한 아천글로벌이라는 회사의 자금을 투입할지는 두고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증권가는 김 전 부회장의 위디츠 유상증자 참여를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 위디츠 측은 이 같은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유명인사의 유상증자 참여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 측에서도 이 같은 소문에 손사래를 친다. 아천글로벌 관계자는 “김 전 부회장은 위디츠의 유상증자 참여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현대 출신 임원들이 대거 영입되는 등, 주변 정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서 김 전 부회장의 지분인수설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위디츠는 오는 8월 3일 열릴 주주총회에서 현대건설 방콕 지점장 등을 지낸 방영원 씨를 이사 후보로, 현대상사 대표이사를 지낸 이주영 씨를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할 계획이다.
위디츠는 이전에도 현대그룹과의 연관설이 돌았던 전력이 있는 기업. 인수합병(M&A)시장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위디츠의 경우 이전에도 M&A업계에 김 전 부회장의 인수설이 돌았던 적이 있다”며 “구체적인 사실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지만 대북사업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거론되곤 했다”고 말했다.
한편 김 전 부회장의 아들인 김진오 씨도 코스닥 기업인 샤인시스템을 통해 대북사업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PVC창호 업체인 샤인시스템은 지난 5월 주주총회를 열고 김 전 부회장의 아들인 김진오 미래마인 대표를 이사로 선출했다. 아울러 현대건설 본부장을 지낸 방정섭 씨를 사외이사로, 현대건설 전무를 지낸 강용득 씨를 감사로 신규 선임했다.
여기에 샤인시스템은 최근 사업 목적에 수산물 도·소매업을 추가해 대북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북한과의 사업에 나선 국내 기업들이 사업선수금조의 돈 때문에 고생하지 않은 기업이 없다. 현대그룹의 금강산 사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천을 통해 ‘육로를 통한 농산물 수송’ 사업권을 따낸 김 전 부회장이 대북사업 본격화에 들어갈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주목받고 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