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60>
▲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한송사석조보살좌상 사진제공=국립춘천박물관 |
강릉시 남항진동에 위치한 한송사(寒松寺)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 아니다. 하지만 한송 사는 노랫말 속에서, 역사 기록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강릉시 대전동 117번지 태장봉을 배경으로 한 지은이 미상의 ‘태장봉 화전가고’를 보자. 화전가고란 봄에 부녀자들이 꽃전을 부쳐 먹으며 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랫말에는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경포대, 대관령, 오죽헌, 명사십리(明沙十里)가 등장한다. 한송사도 거기에 끼었다.
(강릉시 남항진동) 백사장(白沙場) 부근에 한송사 보살상이 있다. 한송사는 삼국시대에 지어졌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송사는 역사 기록에서도 뚜렷하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 화랑들이 와서 선(禪)과 다(茶)를 익히면서 수련을 쌓았다고 한다. 고려 말에 이곡(李穀:1298∼1351)이 쓴 <동유기 (東遊記)>에는 ‘절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석상이 솟아 있고, 동쪽에 4기의 비석과 귀부 (龜趺) 등이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절터에서 석조보살좌상이 나왔다.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92㎝의 백옥불(白玉佛)이었 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대부분 화강암인 것을 감안하면 예사롭지 않다. 대리석으로 만 들었기 때문에 아주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희고 윤기가 난다.
석조보살좌상은 10세기경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의 불 상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예컨대 귀가 양 어깨에 거의 닿을 정도로 길다. 머리에 키가 높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 점도 고려 초기 강원도(명주) 지역 불상이나 보살상의 특색이 다. 강릉 신복사지석불좌상이나 오대산 월정사석조보살좌상도 긴 원통형 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조각 양식에서는 통일신라의 전통을 따랐다. 경주 석굴암 감실(龕室)의 보살상을 닮았다. 결국 통일신라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려 초기 명주(강원도) 지방의 특색을 지녔다.
석조보살좌상은 얼굴과 몸이 둥글고 풍요로운 느낌을 준다. 섬세한 선과 조각의 아름다 움을 하나씩 뜯어보자. 얼굴의 윤곽은 직사각형이면서도 통통하다. 하관이 발달해 둥근 턱이 얼굴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눈썹이 깊게 패어 명암이 뚜렷하다. 웬일인지 코끝이 약간 아래로 구부러졌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손은 사람의 손 모습을 꼭 닮았지만 약간 크게 조각되었다. 오른손은 연꽃을 쥐고 있다. 왼손은 특이하게도 둘째손가락만 곧게 폈다. 목에는 굵은 세 줄기 주름이 띠처럼 무겁게 새겨졌다. 불교에서는 이를 삼도(三道)라고 한다(주1). 늘어뜨린 머리는 양어깨 위에 자연스 럽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상체에는 두꺼운 옷을 걸쳤는데 무늬가 선명하다. 다리도 가부좌 를 틀지 않았다. 오른 다리를 안으로 넣고, 왼 다리를 밖에 두었다. 섬세함이 말로 묘사하 기 힘들 정도다.
석조보살좌상은 오랫동안 수난을 겪었다. 우선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 기상학자이 자 초대 인천관측소장(仁川觀測所長)이었던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에 의해 발견 될 때까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다. 이마 중심 부분인 백호(白毫)가 흉하게 떨어져나갔다.
두 번째 수난은 일본으로의 반출이었다. 와다 유지는 석조보살좌상이 있던 암자의 주지 에게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이 보살상을 양도받았다. 그리고 1912년에 보살상을 동경제실 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 현 도쿄국립박물관)에 헌납했다. 그렇게 석조보살좌상은 일본에 서 50년의 세월을 보냈다. 다행이 1965년에 맺어진 문화재협정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보 제124호다.
하지만 수난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 어렵다. 석조보살좌상이 원래 있었던 한송사에서 멀리 떨어져 보관되고 있는 까닭이다. 더욱이 함께 발견되었던 ‘한송사지 석불상’(보물 제81호)과도 떨어져 있다. 석불상은 강릉시청이 소장하고 있다.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사는 한국의 미(美)의 수난사처럼 느껴진다. 한송사는 고려 시대 이래로 복원되지 못했다. 한송사터에 남아 있던 석조보살좌상은 집을 잃고 디아스포 라처럼 떠돌다가 춘천박물관에 둥지를 틀었지만 여전히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신세다. 석조 보살좌상이 지니고 있는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 또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떠 돌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안타까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