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도 아우도 자녀도… ‘악마의 저주’
▲ 존 F 케네디와 그의 가족 사진(가운데가 부친인 조셉 케네디). 비극은 케네디 대통령 당대에만 그치지 않고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
케네디 가문의 화려한 영광 이면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에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케네디 패밀리의 사람들은 불운한 운명을 맞이해야 했고, 혹자는 이것을 ‘케네디 가문의 저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존 F 케네디의 죽음이 그 시작일까? 그렇지 않다. 그의 형 조셉 케네디 주니어의 죽음은, 어쩌면 이 가문이 지니게 될 ‘흑역사’의 시작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에겐 네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이 있었다. 조셉 케네디는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그 첫 대상은 장남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였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었다. 하버드대학을 나온 그는 2차 대전이 터지자 25세에 해군에 자원입대했고, 해군 소속의 비행단 소속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50회의 출격 임무를 완수한 후 1944년 6월에 제대 명령을 받았지만 마지막으로 아프로디테 작전에 지원했다. 그는 1944년 8월 12일에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탔는데 여기엔 TNT보다 불안정한 11톤짜리 폭탄이 탑재되어 있었다. 일종의 실험 비행이었는데 비행기는 목표 고도에 이르렀을 때 폭발해버렸고, 그의 유해는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보면 자살 행위에 가까운 이 위험한 비행에, 이미 제대할 자격을 갖추었던 조셉 케네디 주니어는 왜 지원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애국심이었을 것이며 좀 더 근원적인 부분은 “우리에게 위험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케네디 가문 특유의 신념과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들에게 닥치는 불행들의 기저엔, 자신들에겐 불사조 같은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존 F 케네디는 베네수엘라 지역을 여행할 때 경호원 없이 폭도들 사이를 누빈 적도 있었고, 로버트 케네디는 열대 폭풍우를 뚫는 아마존 계곡의 카누 여행을 가이드 없이 나서기도 했으며, 막내인 에드워드는 난폭 운전자에 스피드광이었다. 그들은 삶 자체를 모험으로 여기는, 조금은 무모한 형제들이었다.
첫째 아들이 죽자 조셉 케네디는 둘째아들인 존 F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형과 함께 역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존 F 케네디는 사실 군대에 갈 수 없는 건강 상태였다(생명보험 가입이 거부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지원했고, 해군 장교로서 허름한 초계정을 타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난파 상태를 맞이한다. 그는 부상자들을 이끌면서 수 킬로미터를 헤엄쳐 부하들을 모두 살려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후 그는 예정(?)대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는 암살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 하비 오스왈드가 쏜 단 한 발의 총알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몸엔 일곱 군데의 총상이 발견된 이 미스터리한 사건은 CIA와 KGB와 쿠바의 공산주의자와 마피아와 군수산업 거물들이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아직도 합의할 만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5년 뒤 케네디 가문의 셋째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는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으나 선거 운동 기간에 팔레스타인 출신의 시르한 시르한이라는 아랍인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막내였던 에드워드는 천수를 누리긴 했지만 채퍼퀴딕 사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케네디 가문의 딸들에게도 불행은 있었다. 장녀인 로즈메리 케네디는 어린 시절 뇌 손상을 입었는데, 23세 때 아버지 조셉의 요청으로 신기술에 의한 뇌수술을 받았으나 오히려 더 안 좋은 상태가 되었고, 그녀는 거의 어린아이의 지능 상태로 평생을 보호시설에서 지냈다.
둘째딸인 캐슬린 케네디는 첫 남편을 전쟁에서 잃고 아일랜드 출신의 부호인 피터 피츠윌리엄과 결혼하려 했다. 하지만 이혼 경력이 있는 피츠윌리엄과 결혼할 경우 캐슬린은 가톨릭의 성사를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에 어머니 로즈 케네디는 끝까지 결혼을 반대했고, 캐슬린 케네디는 피츠윌리엄과 함께 부모의 눈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가다가 악천후 속에서 추락사했다. 더욱 안타까운 건 가문의 비극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내 재클린은 첫 아이를 유산했고 둘째 아이를 사산했으며, 1963년에 낳은 아들 패트릭을 이틀 만에 잃었다. 1960년에 낳은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99년 사촌동생인 로리 케네디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비행기를 직접 몰고 가다가 대서양에서 추락해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들도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셋째아들인 데이비드 케네디는 열세 살 때 익사의 위험에서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이후 약물 과다 복용으로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넷째아들인 마이클 케네디는 1997년에 스키를 타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어떤 보호 장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동생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의 장녀인 카라 케네디는 41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인 에드워드 케네디 2세는 12세 때 골수암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케네디 패밀리. 그들은 여전히 미국의 귀족 가문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아널드 슈워제네거도 가문의 일원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